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질외사정(侄畏思/正)을 반대함
정희진(대학 강사)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4-04-15

나는 글쓰기와 강의가 직업인 비정규직 노동자다. 간혹 독자 메일을 받는데 며칠 전 다소 특이한, 정확히 말하면 오타가 섞인 편지를 받았다. “당신의 인생을 함축한 사자성어를 알려드리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 모양인데, 어떤 독자가 내 사주를 보내주었다. 표의어인 한자와 표음어인 한글의 차이를 이용한 일종의 유머 같은데, 내 인생은 ‘탐관오리’(探款悟理)로 요약된단다(정성을 다해 이치를 깨달은 삶은 그 자체로 진리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이메일로 내 팔자(?)를 알려줘 재미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일은 그다음이다. 그는 “참고사항”이라며 자기 사주도 알려주었다. “절대 음담패설 아님”이라는 양해를 덧붙인 그의 운명은 ‘질외사정’(侄畏思貞, 어리석음을 두려워하고 올바른 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한참 웃었다. “올바른 것을 생각”한다면 사정(思正)이 맞다. 그 사이트의 표기도 ‘正’이다. 내 짐작에 이 독자는 한자 세대가 아닌 데다 편지의 문맥을 보니 성욕 때문에 고민이 많은 청년 같았다. 그러다보니 무의식적으로 ‘正’보다 어려운(?) ‘貞’으로 쓴 것이다. 사정(思貞)일 경우, 거칠게 말해, 의지와는 반대로 섹스만 생각한다는 뜻이다. 정절(貞節). 그 글자다.

웃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뜻, 그러니까 불안전한 피임법인 질외사정(膣外射精)에서 질외는 논외로 하고, 사정에 집중하면 사정(思正)이 아니라 사정(思情)이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정황(情況)과 맥락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삶. 올바름이 기준이 아니라 사유의 체현으로서 감정(emotion)의 동학이 정의로울뿐 아니라 ‘과학적’이다. 이는 근대 철학을 성찰한 현상학,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등에서 이미 주장된 바다. 갈등과 혼란은 중요한 정치지만 국민은 관심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이념 수준에도 못 미치는 레벨 떨어지는 대의 분쟁을 일삼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을 보라. 정(正)은 도그마(dogma), 하나만 옳다는 독선이다. 판관자의 자세다. 실제는 정치경제학 이유지만, 전쟁 역시 진실과 정의라는 당의정으로 코팅된다.

인간관계에서든 사회적 논의에서든 옳고 그름을 놓고 갈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결론이 안 난다. 공론(空論)이 공회전할 뿐이다. 공동체가 처한 조건과 당사자의 관점을 중심으로 말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때 출발이 되는 몸(뇌)의 상태가 정(情)이다.

사실 나는 정(正)이 무섭다. 올바름, 진리…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폭력이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소통을 가로 막는 장치다. 다양성을 주장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올바름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합과 갈등의 산물이다. 선재(先在)하거나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남에게 피해만 없다면 사정(思正)보다 사정(射精)이 낫다.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의 반전운동처럼 전쟁 대신 섹스를! 하나의 올바름만 추구하는 사람은 통제적인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 욕망과 고뇌, 자신에게 몰두하는 자위하는 자세로부터 대화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공공장소에서는 다소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