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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세번의 장례식

워킹타이틀 시대의 시작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에는 매력적인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휴 그랜트, 앤디 맥도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존 한나, 로완 앳킨스까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이 영화에서 노총각 휴 그랜트는 남의 결혼식에 지각 참석하는 것이 일상이고, 장례식은 우연한 사건이다.

좋아하는 영화지만 영화의 장례식 분위기는 지금 우리 삶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영화’겠지. 워낙 의례적인 일을 싫어하는 데다 ‘이성애자인 것 같은’ 나는 이성애 제도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 장례식은 가끔 간다. 그것도 망자가 나를 모르는 경우에만 간다.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나 사회운동가의 장례식에 가서 혼자 인사하고 온다.

지난 5월, 어느 금요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 설치된 세월호 분향소에 갔다.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줄이 길었다. 4명씩 한줄. 검은 정장의 진행요원이 나눠준 국화를 받아들고 분향소에 들어간다. 사망자 사진은 없고 국화만 있다. 진행자가 “묵념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다 같이 5초 정도 고개를 숙인 뒤 헌화하고 나온다. 시민들이 매단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날린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리본에 적을 수 있다.

은행에 들르려고 길을 건너는데, 분향소가 또 있다. 규모가 작다. 장애인 등급제 폐지문제 때문에 돌아가신 고 송국현씨의 분향소였다. 세월호 분향소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친다. 천막 안에는 평소보다 더 조용히 시민의 관심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장애인 활동가가 희망을 뜻하는 분홍 종이배와 팸플릿을 나누어주면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52살에 자립을 시작한 송국현씨는 활동 지원 서비스가 필요한데 이 제도는 장애 1, 2급만 받을 수 있다. 송국현씨는 3급이라 지원받을 수 없었다. 장애등급심사센터는 그에게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판정했다. 나는 배가 고픈데 남이 “당신은 배고프지 않다”라고 판단하는 식이다.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4월13일, 집에 불이 났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혼자서 대피할 수 없었던 그는 몸의 3분의 1을 불에 내주고 4일 뒤 사망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16일 이후 연이은 사건사고와 선거, 더위까지. 사람들은 지친 듯하다. 원래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자연스런 인생사지만 몰살과 사회적 타살은 평범한 장례가 불가능하다. 지금 이 나라의 상제는 관혼의 분위기도 죄스러울 정도로 비상사태의 연속이다. 돌아가고 싶은 일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 그런 곳은 없어졌다.

기운이 없었지만 선약을 취소하기 귀찮아서 겨우 발길을 옮겨 <한공주>를 보았다. 길고 긴 ‘장례식’이었다. 하루 세번의 장례식. 흔한 일이 아니기를 바랄 수 있을까. <한공주>는 마지막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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