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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좌파 생명, 우파 생명
손아람(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4-07-29

3차원 공간에서 거울대칭이지만 포개지지 않는 기하학적 구조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을 카이랄리티(chirality)라고 한다. 쉽게 말해 왼손과 오른손 외에 대칭 구조인 제3의 손 모양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자 역시 언제나 두 가지 결합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개념은 화학에서 자주 사용되며, 학자들도 ‘왼손’과 ‘오른손’이라는 표현으로 분자를 분류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염기를 공유하기에 하나의 조상에서 분화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론적으로 DNA 역시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DNA는 오른손잡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우파 생명인 셈이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은 좌파 생명들이 멸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철저한 배태는 아주 드문 일인데, 아직까지 생물학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일부 우주생물학자들은 이것을 생명이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의 미생물이 유입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로 본다.

지인인 계산생물학자가 재미있는 사고 실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만약 좌파 생명과 우파 생명이 공존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단 현재의 ‘종속과목강문계’ 생물 범주 최상위에 좌/우라는 구획이 더 추가됐을 것이다. 아무리 군침이 돌아도 우파 인간은 좌파 치킨을 함부로 뜯어먹을 수 없다. 분자구조가 반대 방향이라서 소화시킬 수 없거나 심지어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좌파 인간과 우파 인간은 물과 광물 등의 무기물 자원을 두고 여전히 다투겠지만, 적어도 식량을 두고는 경쟁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좌파 생명과 우파 생명간의 이해관계는 내부적 이해관계만큼 크게 중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대성이 누그러진 우호적인 친선을 맺었을까? 반대로 서로를 ‘소중한 생명 자원’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진화하진 않았을까?

이 사고 실험의 딜레마는 윤리학의 발원에 맞닿아 있다. 윤리학이 근본적인 형이상학의 기저를 갖는다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명제는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학을 효용가치가 있는 행동지침이 당위화된 체계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와 생물적 통약성이 없는 생명을 존중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휴지를 찢어발기는 고양이처럼 서로를 학살할 때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우파 인간들은 친척 외의 존재를 만난 적이 없기에 ‘우파 인간성’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 그 첫 번째 검증의 기회는 외계의 생명과 접촉한 순간이 될 것이다. SF영화처럼 외계 생명과의 교우가 낭만적으로 진행될 리는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만약 외계인이 초음파로 말하는 종이컵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며 공존할 인내심을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