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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정희진(대학 강사) 2014-09-02

며칠 전 짧은 수련회에 갔다. 한 참가자가 내내 시무룩하기에 나는 배려한답시고 “이 주변에 솔방울이 많은데 기분 전환 겸 같이 주우러 가실래요?”라고 제안했다. 물을 머금은 솔방울은 겨울에 천연 가습기 역할을 한다. 지인들에게 선물하면 좋아해서 나는 원래 솔방울을 주우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제 여자친구가 중학생 때 선생이 산에 솔방울 주우러 가자고 꼬여서 따라갔다가 안 좋은(성폭행) 일이 있어서요. 저도 꺼림칙하네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아, 여긴 등산 안 해도 돼요. 길거리에 많이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내가 답답했던지 동료가 나를 불러내어 상황 분석을 해주었다.

평소 ‘젊고 미남’이라는 자부심에 넘치는 그는 팩과 미백 화장품으로 외모 관리에 열성인 ‘메트로 섹슈얼’로, 모든 인간을 외모로 판단한단다. 그러니 ‘뚱뚱한 중년’인 내가 산에서 자신과 ‘썸’을 꿈꾸거나 ‘덮칠’ 것으로 상상하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줌마 주제에 감히 나한테 대시를!”이라는 발상.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나는 분노한 나머지 엉뚱한 대사를 치고 말았다. “뭐야? 당신이 유아인이야?”

물론 문제는 ‘쉰 밀회’가 아니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가 작동하긴 했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성폭력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젊고 예쁘거나 옷과 피부에 돈을 많이 쓰는 중산층 여성이었다면 그런 오해와 발언을 했겠느냐고 질문했다. “당신의 나이 차별, 계급 우월 의식이 여성의 외모를 매개로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바로 수긍했고 사과했다.

사법적 차원에서 성폭력 인식은 동의 여부가 중요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냐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은 가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이고, 범죄 장소 역시 80%가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이다. 통념과 달리 실제로 ‘밤길 성폭력’은 드물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에서 양복 차림의 남성과 건달처럼 보이는 남성과 마주쳤을 때 여성이 느끼는 공포감은 다르다. 스파이크 리의 초기 영화를 보라.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함께 걸어가기만 해도 사람들은 강간 신고를 한다.

나는 그의 사과가 더 기분 나빴다. 진심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그가 재치 있게 “산에 가면 제가 선생님에게 나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했다면 해프닝으로 끝날 사안이었다. 성폭력은 성별만이 아니라 성별이 나이, 인종, 계급, 장애 등과 어떤 조합을 맺는가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노인, 장애인, 뚱뚱한 사람, 가난한 남성, 동성애자는 무성적(asexual) 존재거나 과잉 성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아줌마(나)도 그중 하나다. 같은 제안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데이트 신청일 수도, 성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성별은 어떤 경우에도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성별이 ‘여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