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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의 미로 <자유의 언덕>

모르는 건 모른다 해서 모리일까, 라틴어로 죽음이란 뜻의 모리일까. 다의적 이름을 지닌 일본 남자 모리(가세 료)는 자신이 아는 가장 훌륭하고 존경하는 여자 권(서영화)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오지만, 몸이 아파 서울을 떠난 그녀를 찾는 데 실패하고 편지를 남긴다. 그녀가 사는 북촌에 머물며 보낸 하루하루를 일기처럼 써내려간 것들이다. 그런데 편지를 전해 받은 권이 계단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날짜가 뒤섞이면서, 모리의 시간이 무작위로 펼쳐진다.

시간의 배열은 뒤엉켜 있지만 북촌을 거니는 모리의 일상은 단조롭다. 늦잠을 자고, 권이 북촌에 돌아왔는지 확인하고, 영선(문소리)의 카페 ‘자유의 언덕’에서 책을 읽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게스트 하우스 주인 구옥(윤여정)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조카 상원(김의성)과 맛있는 밥과 술을 즐기고, 꿈을 꾸고…. 덩달아 그의 마음도 고됐다 혼란스러웠다 좋았다 한다. 그렇게 얼기설기 흩어진 모리의 시간이 그것들을 붙여가던 권의 시간과 비로소 만나는 지점이 발생하는데,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감동적이다.

홍상수의 전작 <우리 선희>만 놓고 보자면 웃음의 크기는 소소해졌고, 죽음의 그림자는 짙어졌다. 피안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이미지와 소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어둡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막연한 희망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물론 작품의 중심에서 그 명암을 섬세하게 조절해내는 것은 가세 료의 연기다. 감독이 줄곧 말해온 ‘중립적 표면’에 꼭 어울리는 얼굴을 지닌 듯한 그를 따라 즐거이 시간의 미로를 헤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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