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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올슨] <베리 굿 걸>
이주현 2014-09-23

엘리자베스 올슨

엘리자베스 올슨에게 ‘올슨’이라는 성은 결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적이 없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패션디자이너로 성공한 쌍둥이 언니들(메리 케이트 올슨, 애슐리 올슨)의 명성은 오히려 할리우드가 얼마나 소란스러운 동네인지를 일찍 깨우쳐줬을 뿐이다. 엘리자베스 올슨은 올슨가의 ‘베리 굿 걸’로 자랐다. 그리고 언니들만큼이나 똑똑하게 제 길을 닦아나갔다. 4살 때부터 TV에 얼굴을 비쳤고, 7살 때부터 연기 수업을 받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좀더 편한 옷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는 과정을 손쉽게 건너뛰지 않았다. “LA에 살던 십대 시절,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던 올슨은 열넷, 열다섯살 시절에 “배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특기생으로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연극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배구는 그만뒀다.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때가 된 것이다.

올슨은 뉴욕대 티시예술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탐하기 시작한다. 대학 재학 중에 애틀랜틱 시어터 컴퍼니에 들어가 오프브로드웨이 무대 경험을 쌓았고, 2011년에 공포영화 <사일런트 스크림>으로 영화의 문을 두드렸다. 이후 1년에 두세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성큼성큼 배우로서 보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2013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베리 굿 걸>은 대학 진학을 앞둔 스무살 두 소녀의 이야기다. 마음을 숨기고 말을 아끼는 것이 몸에 밴 릴리(다코타 패닝)와는 정반대로 올슨이 연기하는 제리는 제 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소녀다. 해변가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데이빗(보이드 홀브룩)에게 첫눈에 반해 먼저 전화하고, 먼저 고백하고, 먼저 안겨버리는 소녀.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스무살의 패기로 발가벗고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었던 것처럼, 제리는 사랑에도 풍덩 자신을 던져버린다. 나오미 포너 감독도 말했듯 <베리 굿 걸>은 “릴리의 눈”으로 본 스무살의 어느 뜨겁고 아픈 여름날의 이야기다. 사랑의 화살표가 어긋나는 바람에 시시콜콜한 일상을 빠짐없이 공유해온 단짝 친구 제리와 릴리의 관계엔 보이지 않는 금이 간다. 거기에 사랑했던 가족의 빈자리마저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소녀들은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다코타 패닝이 첫 경험의 달뜬 마음조차 차분하고 사려 깊게 꾹꾹 눌러 담는다면, 엘리자베스 올슨은 자유분방함과 생기로 스무살의 여름을 달군다. 두 여배우가 한 프레임에 잡혔을 때 단번에 관객의 시선을 빼앗는 쪽은 다코타 패닝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올슨이다. 절제하는 릴리보다 발산하는 제리가 더 직접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두드리기 때문인데, 특히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장면에서 올슨의 연기는 매우 단단하고 힘이 있다. 나오미 포너 감독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분노, 공허함, 죄책감, 짝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집착이 눈물을 대신한다”고 했다. 올슨은 그 다양한 감정을 품고 한없이 투명한 스무살의 제리가 된다. 한편 <베리 굿 걸>은 올슨에게는 잊지 못할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올슨은 영화 속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보이드 홀브룩과 영화를 찍으며 연인이 되었고, 최근엔 결혼까지 약속했다. 영화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현실에서 이루어졌으니 특별한 경사(慶事)라 할 만하다.

독립/예술영화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블록버스터영화에까지 진출한 올슨의 행보는 얼핏 스칼렛 요한슨과 제니퍼 로렌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깡마른 미녀가 아니라 섹시하고 건강한 몸을 지닌 배우라는 것도 세 여배우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 스칼렛 요한슨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2003)로 주목받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어벤져스>의 블랙 위도우로 활약중이다. 제니퍼 로렌스는 <버닝 플레인>(2008)과 <윈터스 본>(2010)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엑스맨> 시리즈의 미스틱으로 마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니퍼 로렌스보다 한살이 더 많은 엘리자베스 올슨은 주연을 맡은 첫 영화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2011)으로 시카고비평가협회상 등 각종 비평가협회에서 주는 9개의 연기상을 가져갔다. 올슨이 연기한 마사는 서로의 몸과 마음을 나누며 집단생활을 하는 사이비 단체에서 도망쳐 나와 과거의 트라우마를 떨쳐내려 하는 인물이다. 몸과 마음이 두루 고통스러울 게 뻔한 이 작품에 올슨은 순식간에 매료됐다고 한다. 안목은 정확했고, 도전은 과감했다.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을 본 찰리 스트레이턴 감독은 “섹시하면서도 미스터리하고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올슨을 <테레즈 라캥>의 테레즈 부인 역으로 캐스팅한다. 올슨은 1860년대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남편의 소꿉친구와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릴 사랑을 나누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제 발로 파멸의 늪을 향해 걸어가는 테레즈 라캥은 <마사 마시 메이 마릴린>의 마사보다 더 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물이다. 원작인 에밀 졸라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 올슨은 놀랍도록 섬세한 표정으로 테레즈 라캥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한다. “대담한 캐릭터”를 곧잘 소화하는 올슨은 이후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리메이크한 스파이크 리의 <올드보이>에 마리로 출연한다. 강혜정이 연기한 미도 캐릭터는 마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그러나 민망할 정도로 별볼일 없었던 이 영화는 조시 브롤린, 샬토 코플리, 새뮤얼 L. 잭슨 등 좋은 배우들의 재능마저 낭비하는 우를 범한다. 그나마 유일하게 눈 둘 곳은 정말이지 엘리자베스 올슨뿐이다.

3~4년 전만 해도 일일이 오디션을 봐가며 캐릭터를 따냈던 올슨은 이제 할리우드의 감독 및 제작자가 너도나도 탐내는 배우가 됐다. <고질라>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같은 블록버스터영화의 주요 배역을 꿰차게 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쿠키 영상에 짧게 등장했던 스칼렛 위치(혹은 완다 막시모프)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본격적으로 제 능력을 과시할 예정이다. 퀵실버의 여동생이자 매그니토의 딸인 스칼렛 위치는 마법을 통해 현실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캐릭터. 스칼렛 요한슨과 제니퍼 로렌스와 함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원이 됐으니 조만간 세 여배우의 힘대결이 스크린에서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10월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미국 비트세대 작가들의 이야기를 그린 <킬 유어 달링>에선 잭 케루악을 사랑한 이디 파커로 출연한다. 미국의 컨트리 가수 행크 윌리엄스의 전기를 다루는 <I Saw the Light>에도 톰 히들스턴과 함께 캐스팅된 상태이고, 가이 리치 감독의 <원탁의 기사: 아서왕>에도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올슨의 꽉 찬 스케줄을 보니, 앞으로 ‘쌍둥이 올슨 자매의 동생’으로, ‘올슨가의 막내’로 먼저 기억될 일은 없어 보인다.

테레즈 라캥

<테레즈 라캥>의 엘리자베스 올슨은 여러모로 놀랍다. 마치 19세기 여인의 초상화를 본뜬 듯한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한 올슨은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테레즈 라캥의 억눌린 욕망을 표현해낸다. 그래서 나락의 끝으로 달려가는 후반부보다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초•중반의 모습이 더 매력적이다. 창백한 얼굴에 언뜻언뜻 스치는 불안하고 불온한 욕망은 테레즈 라캥의 앞으로의 삶을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든다. 로랑 역으로 출연한 오스카 아이작은 올슨의 얼굴을 두고 “open face”라 했는데,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올슨의 얼굴이 <테레즈 라캥>만큼 매력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아직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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