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탕웨이] 여인의 초상

<황금시대> 탕웨이

“한 여류작가가 낡고 오래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애달프게 만들었어요.” <황금시대>의 한 장면, 격동의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어느 중국 문인은 당대의 여성 작가 샤오홍을 이렇게 추억한다. 항일전쟁과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던 1930, 40년대 중국, <생사의 장>과 <상가> 등의 걸작을 남긴 채 서른한살로 세상을 떠난 샤오홍(1911~42)은 너무 일찍 피어 안타깝게 시들어버린 꽃이었다. 그녀의 일대기를 조명한 허안화 감독의 <황금시대>에서 가난과 사랑, 오해와 스캔들로 점철된 샤오홍의 삶을 재현하는 이는 중국 배우 탕웨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어디에도 쓰지 않았기에 끝내 알 수 없었던 샤오홍의 미스터리한 속마음을 헤아리고 상상하는 건 전적으로 탕웨이의 몫이었다. 그녀가 다사다난한 여인의 초상을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황금시대>의 샤오홍을 보면서는 유독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생 고독하고 쓸쓸했던 한 여류작가와 지난 8월 결혼 소식을 알린 행복한 새 신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얼굴의 탕웨이가 여기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리던 날 밤, 웨스틴조선호텔 부산에서 진행된 그녀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지금 막 개막식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다. 소감이 어떤가. =진심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올해로 부산영화제를 네 번째 찾는 건데, 특히 오늘밤 허안화 감독이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하는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정말로 기쁘다. 나와 주변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허안화 감독의 <황금시대>에서 30년대 중국의 천재 작가 샤오홍으로 분했다. 그녀를 연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결심’했다니! 그렇게 물으면 안 된다. (웃음) 내가 이 영화에 출연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흥분되었는지를 물어봐달라. 허안화 감독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자 즐거움이었다. 3년 전 처음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출연을 결심했지만 투자가 여의치 않아 촬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샤오홍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나. 평소 그녀의 작품을 좋아했었나.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샤오홍의 작품에 푹 빠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마치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녀가 마치 내 일부가 된 느낌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찍는 5개월 동안 샤오홍의 영혼 속에 들어가 있다 빠져나온 느낌이 든다.

-샤오홍을 어떤 인물로 이해했나. =그녀는 30년대 작가들과는 다른 종류의 글을 썼다. 샤오홍의 중요한 특징은 ‘충돌’(conflict)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약한 동시에 거칠었고, 어떤 부분에선 한없이 예민하고 또 어떤 부분에선 그렇지 않았다. 샤오홍은 늘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은 언제나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요소들이 그녀 안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샤오홍이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 =처음으로 샤오홍의 집을 방문하던 날이 기억난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지내왔던 그 집에는 서너살 무렵 샤오홍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을 마주보았을 때 눈높이가 딱 맞았던 기억이 나는데, 오랫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사람의 눈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린 샤오홍과 눈을 맞췄을 때, 그녀의 눈빛이 샤오홍이 죽기 직전의 눈빛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샤오홍과 교감했다고 느꼈고, 그녀를 더 잘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첫 장면이 인상적이다. 세상을 떠난 샤오홍이 자신의 일생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었다. 간결하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장면은 나에게도 무척 중요했다. 영화의 첫 장면이자 앞으로 전개될 샤오홍의 인생을 하나의 컷으로 압축한 장면이기 때문에 샤오홍의 일생에서 내가 기억해야 할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촬영에 임했다. 허안화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보통 굉장히 스트레이트한데, 그 장면에서만큼은 몇번이나 테이크를 가며 어떤 연기가 최선일지 함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든 생각이, 허안화 감독은 정말로 뛰어난 여성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거다. 좋은 감독들은 많지만, 누구나 그녀만큼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그녀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 촬영을 시작할 즈음에는 허안화 감독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현장 곳곳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다섯달의 촬영을 마무리할 시점이 오자 그녀는 거의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무릎에 물이 찼다고 하더라. 난 그녀의 삶이 바로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말고 그녀의 삶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황금시대>의 모든 인물들이 샤오홍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며, 그것이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내 생각에 샤오홍조차도 그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지 못했고, 스스로 어디로 갈 수 있을지조차 몰랐다. 가장 사랑했던 연인조차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평생 외로웠다. 나는 이러한 외로움이 바로 샤오홍이라는 여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당대 중국 여성들의 지위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고려하면 샤오홍의 삶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던 것 같다.

-<황금시대>는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던 영화라고 알고 있다. 샤오홍의 여정을 따라 상하이, 산시, 우한, 하얼빈, 홍콩 등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혹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나. =하얼빈이다. 촬영 당시 하얼빈의 날씨가 영하 39도였다. 야외에서 30분 정도만 촬영해도 온몸이 완전히 얼어붙어버리는 날씨였다. 동상에 걸리는 스탭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상하이로 장소를 옮겨 촬영할 때 누군가 “아, 하얼빈 그립네…”라고 말하더라.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나도 하얼빈이 가장 그립다. 하얼빈을 떠올리면 그때의 기록적인 추위보다 따뜻함의 감정이 먼저 느껴진다. 배우로서도 정말 기묘한 경험인데, 그건 아마도 내 안에 깃든 샤오홍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얼빈은 샤오홍의 고향이다.

-<색, 계>의 막 부인과 <만추>의 애나 등 당신은 그동안 역경과 시련을 겪는 여인들을 종종 연기해왔다. <황금시대>의 샤오홍도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강렬하고 파괴적인 캐릭터의 특성이 실제 삶에 소모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나. =나는 오히려 그런 작품들과 인물 때문에 내 삶이 좀더 풍요로워진다고 느낀다. 영화에서 상실의 경험을 해보니, 오히려 내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 건강, 행복, 부모님, 그리고 남편까지….

-올해는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요즘 느끼는 감정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까. =음…. 한마디로 표현하면 ‘따뜻함’(warm)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생가에서 김태용 감독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도 반가운 뉴스였다. (웃음) =사실 잉마르 베리만의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8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 나에게 베리만과 그의 영화는 거의 신 같은 존재다. 두기봉 감독의 영화를 마치고 연달아 네편의 영화에 출연한 뒤에야 “지금이 바로 그곳에 갈 때야!”라고 외칠 수 있었다. (웃음) 한달 휴가를 얻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태용이 나에게 정말로 거기에 갈 거냐고 묻더라. 그리고 갑자기 프러포즈를 했다. (웃음) 그 당시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지난해 내 생일(10월7일)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내가 1년7개월 동안 쉬지 않고 몇편의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내가 한달 동안 스웨덴으로 떠나버리면 아마 앞으로도 보기 힘들 거라고 태용은 생각했었나보다. 그래서 서둘러 결혼하자고 했던 게 아닐까. (웃음) 한편으로는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편하게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결혼하면 우리는 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거니까. (웃음) 그게 결혼을 결심한 이유였던 것 같다.

-보통의 경우라면 차기작에 대해 묻겠지만, 지금만큼은 이 질문을 해보고 싶다. 배우로서, 개인으로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나. =차기작이라면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연기를 할 거고, 배우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또 악기도 배우고 싶다. 두기봉 감독의 <컨템포러리 뮤지컬 디자인 포 리빙>에 출연하며 다양한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받았고, 악기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단순하고 행복한 삶. 그게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는 삶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헤어 남보라(더콤)•메이크업 정샘물(정샘물 인스피레이션)•의상협찬 구찌, 불가리•장소협찬 웨스틴조선호텔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