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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낭만주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가 파스빈더, 베리만, 니체, 그리고 실스마리아를 만났을 때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향한 사랑은 오래됐다. ‘영화에 대한 영화’인 출세작 <이마 베프>(1996)가 발표될 때부터 아사야스는 파스빈더를 거명하곤 했다. 많은 영화인들이 <이마 베프>의 참고 작품으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1973)을 말할 때, 아사야스는 오히려 파스빈더의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라>(1971)를 더 강조했다. 두 영화 모두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말할 때면 자주 인용되는 작품들이다. 정치적으로 기 드보르의 상황주의에 영향을 받은 급진파였고, 영화적으로는 브레히트-고다르의 반미학의 계보 속에 있는 아사야스 입장에선 트뤼포보다는 파스빈더와의 친연성이 더 자연스러웠을 테다. <이마 베프>가 영화에 대한 영화인 점은 맞지만, 관습적인 영화문법을 공격하는 형식상의 특성이 더욱 남달랐는데, 아사야스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거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이하 <실스마리아>)에도 파스빈더의 영향이 배어 있다. 파스빈더의 <페트라 폰 칸트의 비통한 눈물>(이하 <페트라 폰 칸트>, 1972)처럼, 세대가 다른 두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를 배경으로, 정체성의 혼동을 그리고 있어서다.

아사야스가 극장에서 우리 관객과 처음 만난 것은 장만옥이 주연한 <클린>(2004)을 통해서다. 그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점이 국내 개봉을 용이하게 했을 터다. 하지만 적지 않은 관객이 영화의 낯선 형식에 애를 먹었던 것 같다(그리고 이런 특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선 홍콩 스타인 장만옥이 주연했지만, 서구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제시된 동양인 여성의 고립된 존재는 동일시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불편한 것이었다. 특히 장만옥의 활기찬 모습 혹은 멜로드라마의 품위 있는 모습에 익숙한 관객에겐 <클린>의 주인공 에밀리(장만옥)는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이기가 어려운, 백인 사회에서 내쳐진 오점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그 점이 배우 장만옥을 돋보이게 하고, 그래서 눈물이 나게 하고, 결국 칸에서 여우주연상까지 받게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카메라의 ‘잔인한 표현’ 앞에서 불편함을 느낀 것도 사실일 것이다.

아사야스의 카메라는 이처럼 ‘영화의 역사’가 가리고 있는 ‘사실’을 맨 얼굴로 보여주는 데 과감하다. 아사야스가 인용하길 좋아하는 드보르의 말을 빌리면, “스펙터클은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간의 사회적 관계”인데(<스펙터클의 사회>), 아사야스의 카메라는 그 관습화된 스펙터클의 허구를, 곧 사회적 관계의 마스크를 벗기려 든다. 그래서 아사야스의 리얼리즘은 ‘잔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서구 사회에서의 동양인(여성)의 주변적인 고립을 아사야스처럼 민감하게, 또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감독은 흔치 않다. 그가 유대인이고, 모친이 헝가리계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마 아사야스의 영화들이 낯설다면, 바로 이런 반스펙터클적인 태도 때문일 터다. 주변인 또는 하위주체(서발턴)에 대한 예민한 시각과 사실적인 표현은 아사야스의 거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유지되는 긴장이다.

주변인의 강요된 고립 혹은 제도화된 종속관계 속의 무력감은 <실스마리아>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지는 테마다. 아사야스의 영화가 자주 그렇듯, <실스마리아>도 갑작스런 결별로 영화의 문을 연다. 베테랑 배우인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을 스타로 만든 노감독을 대신해 상을 받으려 스위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만 그 감독이 죽었다는 황당한 전갈을 받는다. 영민한 젊은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은 패닉에 빠진 마리아의 슬픔을 위무하며, 감독과 팬들을 위해서라도 시상식에 참석하길 권한다. 비노쉬와 스튜어트, 곧 스타 여배우와 그에게 고용된 젊은 여비서, <실스마리아>는 이 두 여성의 권력관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두 여성과 베리만의 <페르소나>

실스마리아(Sils Maria)는 스위스 남동쪽 알프스 지역의 조그만 마을 이름이다. 호수와 설산,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간혹 볼 수 있는 바다 같은 구름의 행진이 절경인 곳이다. 산의 정상에서 보면 구름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흐른다.

실스마리아는 또 니체의 팬들에겐 특히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죽기 대략 10년 전부터, 질병으로 고통받던 니체는 여름이면 이곳에서 요양하며 <즐거운 학문> 이후의 주요 작품들을 모두 구상했다. 말하자면 실스마리아는 니체의 창작의 요람이고, 니체 팬들에겐 일종의 ‘성지’다. 죽은 감독은 여기에 살며 글을 쓰고, 연극과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 속에선 니체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지만, 굳이 실스마리아가 배경이라면, 니체는 유령이 돼서라도 여기에 출몰하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어두자.

마리아는 죽은 감독이 20년 전에 발표한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연극 제목인 <말로야 스네이크>는 실스마리아의 말로야(Maloja) 계곡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구름의 행진을 말한다. 그 모습이 뱀과 닮아 ‘말로야 스네이크’라고 불린다. 연극은 기업가인 중년여성 헬레나가 젊은 비서 시그리드를 일방적으로 사랑한 나머지, 결국 이별의 고통으로 자살하고 마는 내용이다. 그 연극을 할 때, 마리아는 젊고 자유로운 비서 시그리드 역을 맡아 유명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작품의 리메이크가 진행되고 있고, 이번에 마리아에게 요구된 역할은 중년 여성인 헬레나이다. 여전히 젊은 시그리드 역을 하고 싶어서 주저했던 마리아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비서 발렌틴을 파트너 삼아 연기 연습을 시작한다.

연극의 내용은 <페트라 폰 칸트>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 같다. 사회적 권력을 가진 중년의 헬레나는 고용된 젊은 비서 시그리드의 청춘을 욕망하고, 사랑에 매달리고, 그럴수록 두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는 역전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극중 인물인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정체성이 결국 한 여성일 수 있다는 강조다. 표면적으로는 중년 헬레나는 자유로운 청춘 시그리드와 대조돼 있는데, 사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게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인물 속에 두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테마이자, 영화적으로는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의 테마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실스마리아>는 한때 시그리드였고, 여전히 시그리드이기를 바라는 베테랑 배우 마리아의 고통스런 자기인식의 과정이 될 것이다.

비서로 나오는 스튜어트는 비노쉬의 극중 상대역인 시그리드의 대사를 대신 읽어주며 연기 연습을 돕는데, 이런 장면은 고스란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문다. 이를테면 대본 속에서 헬레나가 시그리드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은, 그것이 허구(연극 연습)인지, 지금 알프스 산속에서 벌어지는 마리아와 발렌틴 사이의 실제 내용인지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다. 현실로 들어온 허구의 존재를 통해 마리아는 피하고 싶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과 맞닥뜨린다. 마리아는 연극 속의 헬레나처럼 늙어가는 것에 불안해하고, 젊은 발렌틴에게 동료 이상의 친근감을 느낀다. 게다가 자유롭고 당당한 발렌틴에게 점점 의존해갈 때, 마리아는 연극의 내용이 지금의 자신의 싫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불안한 것이다.

허구와 현실의 공존, 이것은 아사야스 영화의 반복된 테마다. 곧 허구는 느닷없이 현실 속으로 침투해, 현실의 관습화된 스펙터클을 의문에 부친다. 갑자기 우리 주위의 평온한 질서가 관습의 긍정으로 유지되는 허위처럼 보이는 것이다. 진실의 유무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아사야스의 이런 특성은 실제 사건을 극화한 <카를로스>(2010) 같은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카를로스는 실제의 테러리스트와 체 게바라 역을 연기하는 허구의 주인공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카를로스>는 실재했던 테러리스트에 관한 사실주의 드라마이기도 하고, ‘영웅화된 전사’를 흉내내는 당찬 테러리스트의 과시적인 연기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이 머무는 곳은 실스마리아에 있는 죽은 감독의 저택이다. 감독의 아내는 이곳에서 연극 연습을 하라며 집을 빌려준다. 아내는 두 사람에게 과거의 흑백영화를 한편 보여준다. 산악영화 전문감독인 독일의 아르놀트 팡크가 만든 <말로야의 구름현상>(1924)이다. 바로 ‘말로야 스네이크’를 찍은 오래된 기록영화다. 죽은 감독은 그 영화의 이미지에 반했고, 그곳 주변에 살며,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희곡을 썼다. 실스마리아의 말로야 계곡은 말하자면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선사한 곳이다. 두 여성은 이곳을 산행하며, 연기 연습을 반복한다. 발렌틴이 “젊음의 특권에 집착하지 마세요”라고 도도하게 말할 때, 마리아는 베테랑답게 연기로 자신의 본심을 숨기지만, 여전히 청춘 시그리드 역에 집착하며 늙어감에 불안해하는 자신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연기 연습을 하며, 어느덧 종속관계에 있던 발렌틴은 연극의 내용처럼 그 관계를 점점 역전시켜나간다. 처음엔 자신을 고용한 스타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어색한 표정을 짓기도 했던 발렌틴이 “그만 떠나겠다”는 대사를 말할 때는 달라진 두 여성 사이의 위계가 명확해진 것 같기도 하다. 연극처럼 마리아만 그 변한 관계를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진실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마리아는 어렴풋이 자기 앞에서 연기를 도와주는 당당한 발렌틴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두 여성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볼 수 있다는 현지인의 예고를 듣고 그 계곡에 오른다. 흰 구름이 저 아래에서 조금씩 밀려와 계곡을 가득 채우고, 파도처럼 흐르는 장면은 <실스마리아>의 장관이다. 이 순간은 헨델의 관현악곡 <라르고>(Largo)로 장식되어 있어, 자연의 웅장함은 우리를 정신적 고양으로까지 이끈다. 핸드헬드의 거친 호흡이 특징인 아사야스의 카메라가 이 순간만은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구름을 담고 있어서인지, ‘말로야 스네이크’ 의 장관은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종교적인 풍경화를 보듯 엄숙하고 경건하다.

마리아는 늙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또 자신의 젊은 시절의 당돌함을 바라보는 불편함 때문에라도 연극을 포기하려 했는데, 어느덧 런던에서의 첫 공연을 앞두고 무대 뒤에서 긴장하고 있다. 마리아는 결국 헬레나 역을 받아들였고, 맞은편에는 자신의 젊은 시절만큼 당돌한 여성(크로 모레츠)이 시그리드 역을 준비 중이다.

실스마리아의 구름과 니체

다시 니체의 실스마리아로 돌아가보자. 아마 니체도 여기서 ‘말로야 스네이크’를 봤을 것 같다. 1881년 처음 실스마리아를 방문한 이후 심각한 발작이 일어난 1989년까지만 따져도 만 8년간 이곳을 왕래한 까닭이다. 실스마리아에서 니체는 사상가로서의 명성을 굳히는 책들을 거의 다 구상했다. 말하자면 실스마리아는 영화 속 자살한 감독에게 그랬던 것처럼 니체에게도 사상의, 창작의 산실 역할을 했다. 이런 정신적 고양의 기운은 두 여성에게도 미치지 않았을까? ‘말로야 스네이크’를 본 뒤, 마리아도 발렌틴도 또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영화는 갑작스런 결별로 시작했는데, 종결도 갑작스런 결별로 이어진다. 그런 느닷없는 결별은 좀 과장하자면, 젊은 니체와 그의 흠모의 대상인 노년 바그너 사이의 결별마저 떠오르게 한다. 두 위인의 불같은 친화력이 급격히 식은 것도 니체가 실스마리아에서 새 삶을 열 때다. 두 남자의 관계는 마리아와 발렌틴처럼, 또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헬레나와 시그리드처럼 불처럼 타올랐다가 얼음처럼 식는다.

영화에선 거명조차 되지 않은 니체의 유령이 이곳에 나타났다면(사실 뱀 같은 구름의 모습이 그런 상상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건 창작에의 선물이자, 죽은 감독의 아내의 말처럼 새로운 결별과 출발에 대한 불길하고도 신비한 예고다. 아사야스는 자기 영화 경력의 정점을 찍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아마도 실스마리아의 구름 덕을 본 것 같다. 실스마리아의 구름, 곧 ‘말로야 스네이크’는 니체의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페르소나>

두 여성의 거울 이미지 영화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두 여성의 분신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처음에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는 자기 앞에 있는 젊은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다 마리아는 자신이 거울을 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묻는다. 다른 두 캐릭터가 하나의 캐릭터로 종합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의 고전으론 역시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가 가장 자주 인용된다. 역시 마리아처럼 배우인 엘리자베스(리브 울만)와 그녀 앞의 간호사 알마(비비 안데르손)는 서로에게 거울 이미지로 비친다. 주요 인물이 유명 배우는 아니지만, 배우 지망생의 분신관계를 다룬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도 이런 계열 작품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두 여성, 특히 나이 든 여성과 젊은 여성 사이의 관계의 변화도 <실스마리아>의 주요 테마다. 할리우드의 고전으론 조셉 맨케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이 대표적이다. 스타 마고(베티 데이비스)와 비서인 이브(앤 백스터)의 권력관계는 후반부에서 역전된다. 파스빈더의 <페트라 폰 칸트의 비통한 눈물>(1972)에서 성공한 디자이너 페트라(마르기트 카르슈텐젠)와 젊은 비서 카린(한나 쉬굴라)의 관계도 그렇다.

배우가 늙어감의 불안에 사로잡혀,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테마도 <실스마리아>에선 주요하게 쓰인다. 이런 테마의 대표작으로는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잇>(1977)이 꼽힌다. 브로드웨이의 스타 머틀(지나 롤랜즈)은 <실스마리아>의 마리아처럼 여전히 자신이 젊은 역할에 맞는다고 오인한다. <실스마리아>는 이렇게 늙어가는 여성(특히 배우)이 젊은 여성과 거울상을 이루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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