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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 on] 정체성에 대한 고민 담아 실험적으로 찍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5-02-26

<조류인간> 신연식 감독

헨젤과 그레텔처럼 황량한 숲속을 헤매는 여자들. 그리고 사라져버린 그 여자들을 찾아헤매는 남자. 판타지, 스릴러 요소들로 충만한 <조류인간>은 줄거리만 들어서는 장르영화로 오해하기 딱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이 창조해낸 이 이야기의 미로를 헤매다보면 전혀 다른 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의 전작 <러시안소설>에서 주인공 신효가 집필한 소설의 제목이었던 <조류인간>은 신연식 감독에게 <러시안소설>과는 다른 의미로 실험과 도전의 작품이었다.

-<조류인간>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부문 상영작이었다. 올해 개봉을 준비하며 달라진 점은 없나.

=전주에서 상영된 버전 그대로다. 사실 <조류인간>을 만든 게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그 이후로 <프랑스 영화처럼>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시나리오 두편을 썼고, 지금은 이준익 감독님이 연출하는 <시인>의 제작을 맡아 프리 프로덕션을 준비 중이다.

-1년 동안 굉장히 바빴겠다.

=원래 영화 서너편을 동시에 진행하곤 했다. (웃음) 지금도 <시인> 준비하면서 <조류인간> 배급부터 마케팅까지 도맡아서 한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은데, <시인>은 대선배 이준익 감독과 함께하는 작품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감독님의 명성에 흠집을 내면 안 되니까.

-<조류인간>은 <러시안소설>의 스핀오프 같은 작품이다.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조류인간>이라는 제목과 내용은 사실 <러시안소설>의 시나리오를 쓰는 도중 생각한 거다. <러시안소설>의 주인공 신효가 썼을 법한 소설의 제목을 무심코 적었는데, ‘조류인간’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영화의 첫 장면과 엔딩 신이 단번에 떠올랐다. 가끔 그런 작품이 있다. 한번에 모든 구상이 다 떠오르는…. 이런 작품들은 시나리오를 쓰는 데에도 4, 5일밖에 안 걸린다. <페어러브>가 그랬고 <조류인간>도 그런 작품이었다. 다만 <배우는 배우다>를 마치고 나서 구상했던 내용이 좀 바뀌긴 했다.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나.

=처음에는 ‘조류인간’이라는 다른 ‘인종’이 현 인류와 공존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혹시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같은 시기에 산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봤나? 그것처럼 우리와 다른 진화체계와 사이클을 가지고 있는 인종이 존재하고, 주인공은 자기 부인이 그런 사람인지 모른 채 살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배우는 배우다>를 함께 작업했던 조명감독님이 타이에서 성전환수술을 받는 걸 보면서 ‘정체성’에 대한 테마가 <조류인간>의 중요한 서사적 줄기가 됐다. 영화의 주인공인 작가 김정석의 부인이 한약방을 찾아가고, 약초꾼 등을 만나고 하는 일련의 과정은 현실 사회에서 성전환수술을 받고자 하는 트랜스젠더들이 겪어야 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얘기를 들어보니 돈이 있다고 다 수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정신적, 육체적, 화학적 진단 결과가 맞아떨어진다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검증이 뒷받침되어야만 성전환수술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접하며 정체성이란 게 개인의 선택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삶의 선택과 방향, 지침, 다시 말해 정체성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개인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지. 이처럼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영화에 더 반영하게 된 듯하다.

-조류, 포유류, 양서류…. 인간 신체가 변형될 수 있는 수많은 ‘종’ 중에서 굳이 ‘조류’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

=이건 작품을 쓸 때 생각한 건 아니고 그 이후에 생각한 건데,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원인은 타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개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인류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세상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종’은 뭘까? 양서류도 애매한 것 같고, 어류는 확실히 아니지. 파충류도 이상하고. 아마도 우리 가까이에 늘 존재하고 있는 ‘종’이 조류라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조류인간’이 되기 위해 김정석의 아내와 소녀가 산속을 헤매는 장면은 ‘환상동화’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확히 내 의도였다.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생각했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피리 부는 사내가 쥐들을 꾀어내듯이, 이은호라는 사내가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들을 현혹시켜 숲으로 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여기에는 어떤 음모도 없지만, 등장인물들은 굉장히 남성적 시선으로 여자들의 실종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것 역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이다.

-이 영화를 보며 흥미로웠던 지점은, 지극히 장르적인 소재와 이야기를 가지고 전혀 장르적이지 않은 영화를 만든 점이었다. 여자들이 실종된다는 설정은 스릴러에서, 인간 신체의 변형은 SF에서, 숲속에서 여자들이 기묘한 사람과 사건을 접하는 건 판타지 장르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맞다. <조류인간>은 장르의 외피를 살짝 얹어놓은 영화다. <러시안소설>이 해외 영화제에도 출품하기 힘든(웃음), 어마어마한 대사를 쏟아내는 극단적인 실험의 영화였다면 <조류인간> 역시 저예산영화에서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실험’한 작품이다. 내포하고 있는 주제는 절대 장르적이지 않은데, 장르의 외피를 입혀놓았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 것인지 나 역시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도 생기더라. 만약 규모의 예산을 투자받을 수 있었다면 <조류인간>은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

=누가 10억원을 줬어도 나는 이 영화를 1억원에 찍었을거다. 처음부터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주제를 장르물로 풀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작품마다 영화의 목적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류인간>은 내게 철저하게 1억원짜리 영화였다. 100만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주제와 이야기가 분명히 있고, 5만명이 소통할 수 있는 주제가 있는 법이다. 만약 더 많은 예산이 투입돼서 영화의 내용을 바꿔야 한다면 이미 그 작품은 <조류인간>이 아니게 되는 거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실 메이저 상업영화로 끌고 올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조류인간>의 테마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했다.

-영화의 목적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명확하다.

=모든 작품을 쓸 때 예산부터 결정해놓고 시작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영화를 만들며 예산을 초과해본 적이 없다. 그간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며 다양한 플랫폼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다양한 개성의 영화들이 나오지 못하는 건, 물론 독과점 같은 것도 문제겠지만 다양한 플랫폼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30억원 영화의 제작방식을 가지고 5억원짜리 영화도 만들고, 10억원짜리 영화도 만드는데 이런 방식이 오히려 비정상 아닌가. 상업영화와 저예산영화에는 태생적으로 다른 기획이 필요하다. 감히 저예산영화 제작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데(웃음), 그건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님이 <시인>을 나와 함께 제작하는 이유도 그래서일 테고. 하지만 당분간 <조류인간> 같은 실험은 안 할 거다. 나도 힘들고, 스탭들도 고생이라. (웃음) 2015년 이후에 만드는 영화들은 아마 많이 다른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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