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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브 파텔] <채피>
장영엽 2015-03-17

데브 파텔

<채피>

모범생 아빠와 불량한 아빠. 아이는 어느 쪽을 더 닮게 될까? <채피>는 어린아이 수준의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채피가 두명의 인간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독특한 개성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채피에게 껄렁한 걸음걸이와 굵은 금목걸이를 걸어준 건 요하네스버그 빈민가 출신의 갱스터 아빠 닌자이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과 고운 마음을 갖게 된 데에는 채피를 만들어낸 천재 과학자 디온의 역할이 크다. 결국 모범적인 아빠와 떨어져 갱스터 부모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 와중에도 채피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쓰면 안 된다”는 디온의 말을 잊지 않는다. 지극히 폭력적인 순간이 찾아왔을 때 디온의 그 한마디는 ‘갱스터 키드’로 자라난 채피를 머뭇거리게 한다.

닭 인형과 물감을 들고 다니며, 애 키우듯 자신이 창조해낸 로봇의 인성을 만들어가는 남자를 연기하는 건 영국 배우 데브 파텔이다. 군수업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정작 회사의 주력 분야인 무기 제작과 전투 능력 향상에는 매력을 하등 못 느끼는 디온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이 수백일간 매달려온 ‘인간처럼 생각하는 로봇 만들기’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다. 마침내 로봇 얼굴에 달린 모니터가 켜지고 로봇이 귀를 쫑긋하는 순간,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업무에 임하던 과학자의 얼굴에는 드라마틱한 경이감이 생겨난다. 그 놀라움의 순간을 표현할 만한 배우로 데브 파텔만 한 적임자가 있을지, <채피>를 보며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약간의 움직임조차 큰 변화로 느껴지는 그의 선하고 시원스러운 이목구비는, 인간의 한계를 지금 막 넘어서버린 어떤 이의 감탄을 대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물론 <채피>의 감독 닐 블롬캠프가 그것만을 의도한 건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다는 당황의 뉘앙스. 데브 파텔의 ‘토끼눈’이 태생적으로 지닌 이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의 정서는 블롬캠프 영화 특유의 귀여움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데브 파텔이라는 열일곱살의 생짜 신인을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의 주인공으로 발탁한 대니 보일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미 영웅이 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영웅이 되어가는 유형의 배우”를 찾고 있었기에 그를 캐스팅했다고. 대니 보일의 말처럼 데브 파텔은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 놀라운 일에 휘말려 지금 현재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놓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배우다. 뭄바이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경험을 토대로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 도전하는 소년 자말을 연기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그렇고, 둘도 없는 절친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자신의 신념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하는 TV시리즈 <스킨스>의 모슬렘 소년 앤워가 그렇다. <채피>의 과학자 디온도 데브 파텔이 전작을 통해 보여준 이러한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데브는 매우 다정하고 인간적이며, 솔직한 동시에 약간은 상처받은 느낌을 주는 배우다. 관객이 이러한 그의 모습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괴짜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외롭고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채피>의 프로듀서 사이먼 킨버그의 말처럼 데브 파텔이 지닌 선하고 평범하며 미처 완성되지 않은 이미지는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는 데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관객의 미소를 유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배우다. 아프간 전쟁이나 이집트 혁명 등의 진지한 아이템을 취급하는 보도국의 일원이지만, 미확인생명체인 ‘빅풋’(big foot)을 취재해야 한다며 팀원들의 타박에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아이템을 들이미는 미국 드라마 <뉴스룸>에서의 맹목성, 여자라는 생물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절친을 부추겨 그를 쫓아다니던 여자와 사귀고 마는 <스킨스>에서의 엉뚱함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인도 사람이지만,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런던 근교의 해로에서 나고 자란 데브 파텔은 영미권 주류 영화계 안에 위치한 그의 입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완전한 영국인”이라고 말하는 데브 파텔에겐 비영어권 출신 배우들이 흔히 가장 큰 진입장벽으로 꼽곤 하는 언어라는 장애물이 없다. 때문에 그는 아시아인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현장에서의 완전한 소통이 가능한 배우를 찾고 있던 뭇 할리우드영화의 제작진에 종종 최적의 선택이 되어왔다. 인도 뭄바이의 호텔 지배인으로 등장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1)과 앞서 언급한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을 것이다. 좀더 파고들어가면 <채피>의 과학자 디온도 사실은 IT 천재를 생각했을 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IT 강국’ 인도 출신 공학 천재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벽한 영어 구사가 가능한 인도계 영국인이라는 점은 이처럼 영미권 주류 영화계에서 ‘인도 영어’를 구사하는 발리우드 스타들이 차마 해내지 못했던 역할과 기회를 데브 파텔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언제나 공정하고 달콤했던 것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데브 파텔에게 주어졌던 역할들은 엄밀히 말하면 영미권 주류 영화계가 아시아, 특히 인도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속 인도의 빈민가,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속 뭄바이의 혼잡한 풍경. 혹은 인도가 직접 로케이션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곳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 짐작되는 <채피> 속 IT맨으로서의 커리어. 데브 파텔은 서양인들이 대개 인도를 떠올렸을 때 연상하곤 하는 일련의 키워드를 갖춘 인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비추곤 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건 그가 이러한 아시아인으로서의 스테레오 타입을 한계라기보다는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누구나 전형성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전형성이 대체 뭐란 말인가? (호주 출신의 배우) 휴 잭맨이 <울버린>이나 다른 영화에서 근육질의 핸섬한 남자 이미지를 구축해왔다고? 맞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멋진 남자이자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틀’을 깨왔다.”

데브 파텔은 어떤 전형성 안에 놓이는 것을 탓하기보다 그 틀 속에서 틀을 깨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배우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시나리오”, 그리고 “누구와 함께 작업할 것인지”다. 이러한 데브 파텔의 말이 으레 하는 답변으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차분하고 신중하게 구축해온 그의 필모그래피 때문이다. 대니 보일(<슬럼독 밀리네어>)과 아론 소킨(<뉴스룸>), 주디 덴치와 빌 나이, 매기 스미스 등의 품격 있는 영국 배우들(<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과 재기발랄한 닐 블롬캠프(<채피>)와의 협업으로 이어지는 데브 파텔의 선택은 그에 대한 신뢰를 한층 두텁게 만든다. 그런 그의 차기작은 니콜 키드먼과 함께하는 영•미•호주의 합작영화 <라이언>이다. 인도의 지하철역에서 길 잃은 소년이 호주의 한 가정에 입양되기까지의 험난한 경험담을 다룬 영화라고 한다. ‘인도’를 테마로 한 이 영화에서 데브 파텔이 어떻게 틀 속의 틀을 깨나가는지를 지켜보는 건, 또 다른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스킨스>

Magic hour

“아빠, 맥시는 게이예요”

10대 청소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금기에 도전장을 내미는 영국 드라마 <스킨스>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관계를 형성했던 건 앤워(데브 파텔)와 맥시(미치 휴어)였다. 약을 하고 여자의 몸을 탐하다가도 집으로 돌아와서는 알라신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모슬렘 소년 앤워는, 동성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받아들이기가 가끔은 어렵다. “여자와 자보려고 노력은 해봤어?” “그러는 너는 남자와 자보려고 노력해봤어?” 그러나 좋은 친구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더라도 친구의 손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앤워의 생일날, 모슬렘 가득한 생일파티 장소에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맥시를 쫓아 현관으로 나온 앤워는 모슬렘 아버지에게 친구의 비밀을 대신 말한다. “아빠, 맥시는 게이예요.” 결과는 해피엔딩. 어깨동무를 하고 파티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에서 데브 파텔의 선한 미소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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