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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다”

<스물> 이병헌 감독

제목대로 <스물>은 청춘의 기운이 물씬한 성장영화다. 첫사랑, 꿈과 현실, 진로 고민 등 스물 하면 으레 떠올릴 법한 소재를 이병헌 감독은 재기발랄하고 경쾌하게 풀어냈다. <과속스캔들>(2008), <써니>(2011), <타짜-신의 손>(2014)의 각색을 맡았고, 장편 데뷔작이자 페이크 다큐멘터리 <힘내세요, 병헌씨>(2012)를 연출했던 그다. 최근 칼질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한 한국영화가 많았던 까닭일까. 언론배급 시사가 끝난 뒤 <스물>은 여기저기서 ‘독특하고 신선한 코미디 감각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같은 호평 때문인지 언론배급 시사가 끝난 뒤 만난 이병헌 감독은 상업영화 첫 연출작을 만든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여유로웠다. “자신있냐고?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반응을 보니 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웃음)”

-언론배급 시사 반응이 좋은 것 같다.

=나쁜 평보다 좋은 평이 많아 기분은 좋다. 이제 막 공개돼 아직은 조심스럽다.

-<힘내세요, 병헌씨>가 개봉할 때와 비교하면 기분이 어떤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남의 돈으로 찍은 영화니. 개봉 규모도 <스물>이 훨씬 크고.

-남의 돈을 써보니 어떻던가.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첫 상업영화를 하면서 영화가 공동 작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촬영하기 전, 내 정서가 대중과 괴리감이 있지 않을까 걱정돼 스탭들에게 시나리오에 대한 조언을 많이 구했다.

-<스물>은 20대 중반에 준비를 시작한 이야기라고 들었다.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27살 때였나. <스물> 초고는 영화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쓴 첫 시나리오다. 초고에는 인물의 연령대가 지금의 스무살이 아닌 그냥 20대였다. 이 영화가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해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에 구체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가 스무살에 첫발을 내딛는 친구들을 등장시키면 귀엽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병맛’ 코미디를 되게 좋아하는데 그런 친구들이 꼴값을 떨어주면 관객이 귀엽게 봐줄 것 같았다.

-그때 썼던 이야기는 지금과 많이 다르나.

=그렇다. 10년 전이다보니 시나리오 작법도 모를 때라 느끼는 대로 막 썼다.

-<스물>을 10년째 놓지 않은 셈인데 이유가 뭔가.

=한동안 손을 놨었다. (웃음) 당시 <스물>은 다른 제작사에 팔려 다른 감독이 준비하던 이야기였다. 투자가 잘 안 됐다.

-왜 투자가 안 됐나.

=이야기가 약했던 것 같다. 당시 분위기는 지금보다 ‘병맛’ 코미디를 더 낯설어했다. 그래서 진행이 중단됐다가 <스물>을 제작한 영화나무 임지문 대표님이 6년 전 시나리오를 사와 준비하다가 또 안 됐다. 그러다가 <힘내세요, 병헌씨>를 보고 내가 연출을 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해서 각색을 해보라고 제의해왔다.

-<스물>이 다시 돌아와서 운명이라고 생각했겠다.

=<힘내세요, 병헌씨>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스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살짝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사실 다른 각본 계약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겨를이 없었는데, 틈틈이 쓰면 될 것 같아 각색을 하기로 했다.

-각색하면서 초고의 20대 이야기를 스무살로 수정한 이유는 뭔가.

=초고는 20대에 꼭 해야 할 일을 나열하는 느낌의 이야기였다. 첫사랑이면 첫사랑, 꿈이면 꿈, 이렇게 코드가 분명해야 대중과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장난기 많고 까불까불하며 노는 스무살 남자아이들의 이야기로 설정하게 됐다.

-치호(김우빈), 경재(강하늘), 동우(이준호), 이 세명의 모델이 있나. 아니면 감독의 여러 성향을 각기 다른 캐릭터에 골고루 반영한 건가.

=처음에는 내 친구들을 모델로 했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남자들이라면 충분히 겪을 법한 이야기로 채워지더라. 어느새 주인공 캐릭터 세명 모두에게 내 모습이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나만 느끼는 건지 궁금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치호에게도, 경재에게도, 동우에게도 내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

-영화를 보니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부분이 꽤 많더라. 캐스팅이 중요했을 것 같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배우들에서 크게 벗어나는 캐스팅을 하기가 싫었다. (김)우빈이와 준호는 시나리오를 쓰면서 떠올렸던 배우들이다. (강)하늘이도 살짝 그랬고. <스물>을 각색할 때쯤 우빈이가 출연한 드라마 <상속자들>이 막 시작됐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안 되겠다, 우빈이를 포기하자고 생각하기도 했다. (웃음) 하늘이도, 준호도 무척 바쁜 친구들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배우들의 실제 모습이 캐릭터에 많이 반영됐나.

=원하는 캐스팅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수정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원하는 캐스팅이 되었기에 그렇게 하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김우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눈에 힘주는 연기만 할 줄 알았는데 코미디 연기도 가능하더라.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빈이 목소리는 남성스러운데 말투가 장난스러운 맛이 있다. 김우빈을 치호 캐릭터처럼 써먹고 싶었던 감독님들이 꽤 있었을 것 같다. 누가 써먹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된다는 조급함이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안무처럼 보일 정도로 액션이 크고, 감정 표현이 솔직한 <스물>의 코미디는 관객에겐 다소 낯설 수 있다. 톤 앤드 매너에 대한 레퍼런스는 없나.

=없다. 솔직히 자신있을 줄 알았는데 안 먹히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됐다. 먹히면 진짜 먹힐 것 같고. 속으로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그런 코미디를 낯설어하진 않던가.

=재미있어 했다. 역시 요즘 ‘것’들이라. (웃음)

-경재는 스무살 시절 서툴 수밖에 없는 첫사랑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다른 캐릭터에 비해 감정 신이 많아 강하늘과 대화를 많이 나눴을 것 같다.

=감정 신도 많은 데다 극을 이끌어가는 화자라 하늘이가 고민을 많이한 것 같더라. 농담처럼 하늘이에게 주문했다. 네가 겁낼 게 뭐가 있냐. 그냥 해. 이 캐릭터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해. 감정의 흐름만 계산하고 나머지 디테일은 현장에서 만들자. 대화가 잘 통했다.

-동우는 부도가 나 망한 아버지 때문에 스무살에 가장이 된 친구다. 어린 시절 아이돌 가수와 배우로 성공한 준호가 어려워하진 않던가.

=준호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래서 이 캐릭터가 뭐가 어렵냐고 말해주었다. 네 꿈은 만화가인데 돈이 없어 현실에 부딪히는 게 뭐가 어려워. 치호, 경재, 동우 모두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건 달라지는 거지,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자, 디테일은 현장에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치호가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자아가 가장 많이 반영된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다.

=치호처럼 나 역시 20대 중반이 되어 불쑥 영화를 하게 된 경우라 비슷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물론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떤 캐릭터가 가장 애착이 갔나.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지금까지 왔다 갔다 한다. 어떤 날에는 동우가, 또 어떤 날에는 치호가 좋고. 경재가 진짜 멋져 보일 때도 있고.

-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세 인물을 골고루 나눠 다뤄야 하는 구조가 인물의 고민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나.

=이런 플롯이 결코 만만치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려웠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어 조금 창피하기도 하다.

-세 친구가 그들의 아지트인 소소반점에 모여 소동극을 벌이는 마지막 시퀀스는 전형적이라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는 인상이 강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 생각을 아주 안 했던 건 아니다. 그 시퀀스는 영화적인 장치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소반점은 고등학생 때부터 세 친구가 모였던 아지트다. 누군가가 스무살의 관문에서 이들을 내쫓아야 영화가 정리가 되잖나. 물리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스무살을 생각하면 약간 슬프기도 하고, 그렇다고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코미디를 가미한 소동극으로 연출했다. 뽕짝 음악도 곁들여서.

-세 인물의 에피소드를 차례로 나열하는 이야기 구조 때문에 엔딩 시퀀스는 인물의 갈등을 한번에 정리하는 게 쉽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대중영화로서 정점 하나는 찍어주고 가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시퀀스지만 재미있게 만들면 용서가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언론배급 시사 기자회견 때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면 입대를 연기하고 싶고,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스무살 때 대학생이 아니었다. 치호처럼 집에만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선생님이 때리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풀어야 하는데, 나는 학교를 아예 안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반항 기질이 있었다.

-섹스는 많이 해봤나.

=치호처럼 말로만 떠들고 경험이 많진 않았다.

-잘생겨서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인기는 많았으나 낯가림도 있어서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감정 표현을 잘 못했다.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한 뒤 취직하지 않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던 이유가 뭔가.

=아버지가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계셔서 졸업하면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이었다. 다른 기업에 취직할 마음이 없으니 시간이 남아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왜 시나리오를 썼나.

=운명 같기도 한데…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어 몇권 없는 책 전부 읽었다. 평소 영화를 즐겨봤던 까닭에 우연히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모전에 낸 거다.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신의 손> 등 강형철 감독의 작품을 각색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재능이 있는데,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단편영화 <냄새는 난다>(2009)를 만들어봤는데 되게 재미있더라.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주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때부터 연출을 하자고 생각했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어떤 작품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은 <스물> 같은 코미디에서 벗어나게 되진 않을까 싶다. 블랙코미디 시나리오도 하나 있고. 아직은 어떤 작품이 될지 모르겠다.

-남다른 코미디 감각이 있다고 들었는데 코미디만 파고 싶은 마음은 없나.

=<스물> 같은 코미디를 워낙 좋아해서 기회가 되면 또 하고 싶긴 하다.

코미디영화로서 <스물>의 장점과 단점은 분명하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접하지 못했던 코미디 감각과 리듬을 갖췄다는 게 장점이라면, 벌여놓은 세 인물의 에피소드를 다소 전형적으로 정리해 서둘러 봉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게 단점이다. 이병헌 감독 역시 이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그는 “이야기가 다소 전형적으로 정리된다는 지적은 인정한다. 하지만 대중영화로서 한번에 인물들의 사연을 정리해야 했기에 그런 지적에 대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했다”고 말했다. 부족한 건 받아들이되 포기할 건 과감하게 포기했다는 점에서 신인다운 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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