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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국가는 없다, 여전히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5-06-09

지난해 4월 미국에 첫 메르스 환자가 유입됐을 때 미국 검역 당국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단다. “메르스가 언젠가는 미국에 도착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의 질병관리본부는 2번이나 최초 메르스 감염자의 확진 검사 요구를 거부했단다. 심지어 “만약 메르스가 아니면 해당 병원이 책임져라”라고 신경질적으로 단서를 붙이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출장자 김모씨 역시, 출국 전 감염이 의심된다며 보건소에 검진을 요청했지만 당국의 조처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초기 대응’이란 안전 시스템의 경고 알람과 같다. 경고 알람이 이렇게 먹통인데, 방역관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리가 있겠나. 정신줄 놓은 보건당국이 초기 대응이랍시고 ‘괴담 유포자 처벌’을 외치며 으름장을 놓는 사이, 메르스 감염자는 속수무책으로 증가했고, 급기야 사망자들과 3차 감염자도 생겨났다. 현재 격리자는 1300명 이상 급증했다. 시민들은 영화 <감기>의 상황으로 치닫는 건 아니냐며 공포에 휩싸여 있다. 사스, 신종플루, 에볼라의 공포가 연달아 내습했음에도 이렇게 안전 먹통의 나라다.

공장제 축산과 도시 슬럼화에 따른 현대 전염병의 진화 속도가 이미 인간의 의학연구 속도를 초월한 지 오래다. 그 탓에 국제사회가 전염병의 변종화와 이동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각국의 방역시스템을 비상체제로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안전은 뒷전이고, 보건행정을 위해 한 일이라곤 경제학과 출신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법대 출신의 인사를 차관에 앉히는 일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보건안전에 비전문가들을 모셔놓고 그저 신자유주의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의료영리화와 의료관광화에 목을 맨 나라가 감염병을 제대로 통제한다는 것은 거의 농담에 가깝다. 이렇게 감염률이 높은 것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인실을 강제하면서 입원 환자들이 높은 밀집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공공의료를 아작낸 터라 감염인들을 위한 공공병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메르스 사태는 너무나 뻔하게 예고된 재난일 뿐이다.

슬프다. 지난해엔 세월호였다면, 올해는 메르스다. 여전히 국가는 없다. 언론은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게 무능력한 국가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무능력한 국가를 참 무던히도 인내하고 지지하는 한국 사람들. 지겹다 못해 공포스럽다. 세월호라는 그 비극적인 경고 사이렌이 한반도에 울려퍼졌지만, 1년도 안 돼 다 망각하고 메르스를 맞이했다.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세상에서 사회적 재난이란 피할 수 없는 장르적 운명, 새삼 그렇게 새로운 걸 본 것처럼 비명 지를 것도 없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가 없는 사회에선 그저 자력갱생만 남을 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안녕을 빈다. 보건복지부가 말한 대로 ‘낙타와의 밀접한 접촉을 피하고 낙타 젖이나 낙타 고기를 먹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