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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수습 기간만 15년, 허벅지에 바늘만 꽂았네

<궁녀> <역린>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으로 살펴본 궁녀의 도(道)

<상의원>

아들만 셋인 집에서 태어나 남중과 남고를 나오고 인문대인데도 정원 30명 중에 여자는 한명뿐인 과에(그러니까 남대…에) 입학한 지지리 복도 없는 선배는 여자 후배들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왜 손톱에 때가 안 껴?” 20년 동안 여자 손톱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 가엾은 청춘입니다. “여자들은 정말 머리채 잡고 싸워?” 취향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대걸레 잡는데요?” 파직, 20년을 품어온 소년의 환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도 난 책상은 안 던졌어요, 기운이 달려서.” 파직, 파직, 파지직.

지금은 남녀공학이 대부분이어서 그럴 일이 별로 없겠지만 혈기 넘치는 여자애들만 수백명이 한데 모여 있다 보면 거칠 것 없는 난폭함이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더러움도. 내 고향 전주에선 누가 비빔밥의 고향 아니랄까봐 수십명이 싸온 도시락을 한데 비벼 숟가락을 한개 꽂은 다음 수업 시간에 돌려가며 퍼먹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러고도 모두 법정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튼튼한 몸으로 졸업을 했으니, 10대의 면역력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 근데 나 장티푸스 걸렸었지, 비빔밥 때문이었나.

복사꽃 피는 아름다운 봄이 지나면 학교 옆 복숭아밭 주인 아저씨는 무슨 여고생들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익지도 않은 복숭아를 털어 먹느냐며 교무실로 쫓아와 울부짖었고, 교사들은 야생동물처럼 달아난 학생들을 잡으러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학교에 붙어 있던 불빛 한점 없는 숲속 무덤가를 헤매곤 했다. 남학교에서 15년을 일하다 전근 온 선생님은 탄식했다, 난 여고생들은 코스모스처럼 가냘픈 줄만 알았다. 파직, 파직, 파지직.

<궁녀>

하지만 그처럼 더럽고 난폭한 여학생들도 여자는 여자였으니 귀밑 3㎝ 이하의 짧은 머리에 교복 차림으로도 가능한 한 예뻐지고자 했던 것이다. 소녀들은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쌍꺼풀을 만들고, 과산화수소로 머리를 탈색하고, 가사 시간에 배운 홈질과 박음질을 활용해 교복 치마의 폭과 길이를 줄여 입었다. 그래봤자 고3 되면 자기가 알아서 도로 튿어졌지만.

그래, 상경하니까 서울 애들은 다들 치마를 늘려 입더라만 치마는 역시 걷어야 제맛, 다트는 쪼여야 제맛, 조선시대 동대문 디자이너(고수)가 궁녀들의 코 묻은 노리개를 터는 영화 <상의원>을 보면서 나는 그 옛날 소녀들의 몸부림을 떠올렸다. 저고리는 짧고 좁게, 치마는 걷어올리고, 허리를 드러내어 여성미를 강조합니다. (그래봤자 허리가 굵으면 아무 소용없지 말입니다.) 원단도 다양하게 쓰고 돈만 주면 자수도 놓아드리지요.

그런데 과연 궁녀들은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 흐뭇한 상상을 하며 읽었지만 알고 보니 그냥 건전한 역사책이어서 분노한 <궁녀: 궁궐에 핀 비밀의 꽃>(이 계보를 잇는 책으로 역시 건전하기 그지없는 <스튜어디스의 비밀노트>가 있다)을 보면 궁녀는 월급은 많았지만 쓸 데가 없어서 땅 사고 집 사는 재테크가 낙이었다고 한다.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고는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뿐(그래도 3년 동안 보라색 교복 입고 다닌 나보다 낫다. 밖에 나가면 가지가 돌아다닌다고 놀림받았어), 영화 <궁녀>의 궁녀들이 노리개와 꽃신에 집착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교복 소녀들의 컬러 양말 같은 거였던 거지, 남들은 몰라도 나만 알면 돼.

<광해, 왕이 된 남자>

이처럼 같은 옷만 입고 살아 슬픈 궁녀지만 더욱 슬픈 사실이 있다. 나는 3년 입은 교복을 궁녀들은 최소 15년 이상 입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열살 미만 꼬마가 입궁하여 수습 기간이 끝나기까지 세월이 15년, 수습 3개월 하면서 “수습은 수습 안 되면 자르라고 수습인 거야” 따위의 아저씨 농담이나 얻어듣고 살았던 나로서는 참 남 일 같지가 않다. 게다가 상궁이 되려면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왕하고 자지 않는 이상 다시 평균 20년 추가, <기황후> <역린>에 나쁜 상궁으로 나온 배우 서이숙(<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나말년 선생님)이 그렇게 나빠 보였던 건 그런 스트레스를 눌러 담은 뛰어난 연기력의 결과다. 절대 현재 여왕 또는 공주로 불리는 그분을 닮은 탓이 아니다, 오해다.

궁녀의 스트레스는 그뿐만이 아니다. 남자라고는 임금 하나, 운 좋으면 세자까지 둘, 긴긴 밤 허벅지에 바늘 꽂으며 사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 인간들이 연애편지 심부름까지 시키지. 괜히 팥죽 끓였다가 임금 대타(이병헌)와 맘이 맞는 구렁텅이에 빠져 성대모사를 비롯한 온갖 어처구니없는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사월이(심은경), 나이 열다섯, 알 거 다 아는 꽃다운 청춘이 “시 쓰고 있네” 탄식이 절로 나오는 대타의 연애편지 낭독까지 들어줘야 한다. 소녀의 마음을 모르는 대타, 솔로의 마음을 모르는 커플.

하지만 진정 형벌은 그 모든 스캔들을 알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 용솟음치는 담화의 욕망을 피를 토하며 다스려야 한다는 것. 뭔가 들었다 하면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바람에 찌라시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기도 전에 충무로의 걸어다니는 찌라시로 불렸던 선배가 궁에 들어갔다면 입에 칼을 물고 맨손으로 땅을 파서 탈출했겠다. 그래서 <역린>에서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며 귀가 잘린(일반적으로는 혀를 자른다) 상궁이 나오기에 영화를 뒤집을 반전의 대형 찌라시를 기대했는데, 그냥 주야장천 폼 잡고 서 있기만 했던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 왜 나왔을까, 그런 반전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건만.

주인공은 중전인데 제목이 그래서 헷갈렸던 영화 <후궁>의 권유(김민준)는 말한다, 고자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내시뿐이어서 입궁했다고(근데 거짓말). 하지만 조선시대 전문직 내시와 궁녀가 무더기로 나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왕이 짝사랑하는 여자하고 한번 하기까지 두 시간 동안 뒷바라지하는 것이 전부다. 전문 기술을 갈고닦으면 뭐하나, 보스를 잘못 만나면 수학과 나왔다고 보스 가계부나 써주는 것이 을의 숙명인 것을.

자기계발은 필수이니라

구중궁궐 ‘비밀의 꽃’으로 피어나기 위한 두세 가지 기술

<궁녀>

자기계발

비록 수습 기간만 15년이긴 해도 궁녀에겐 매우 유혹적인 근무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12시간 노동 36시간 비번의 2교대 근무라는 점이었다. 외출 금지이니 쇼핑하러 나갈 수도 없고 남는 시간에 그 좋다는 자기계발 하기 딱 좋았겠다. <궁녀>의 천령(박진희)을 보라. 궁녀에서 의녀로 성공적인 진로 변경, 그걸로도 모자라서 언제 배웠는지 현장 조사와 협박, 취조, 변장, 주먹질까지 CSI 부럽지 않은 온갖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역린>

눈치

을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눈치란 선택이 아닌 필수, 그냥 회사에서 30년을 일했으면 정년퇴직을 하고도 남았을 나이에 겨우 상궁이 된, 게다가 연애도 쇼핑도 없이 교복만 입고 살았던 상관들의 비위를 맞추려면 눈치 보는 법 과외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하지만 배움엔 너무 늦은 시기란 없는 법, 만학도라도 상관없다. <역린>의 상궁은 눈치가 없어서 귀가 잘렸지만 뒤늦게 도(道)를 깨우쳤는지 뭔가 한 따까리 할 듯한 포스를 뿜어내면서도 끝까지 병풍 노릇만 하지 않는가.

<광해, 왕이 된 남자>

보직

궁궐은 중앙집권제가 아닌 철저한 지방분권제로서 중궁의 궁녀는 중전 소관, 세자궁의 궁녀는 세자 소관, 이런 식으로 관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보직도 중요하여 12시간 노동 36시간 비번이라는 아름다운 교대제 속에서도 침소 담당 지밀 궁녀들은 12시간 노동 12시간 비번으로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자스럽게 근무를 했다. 그중 최악은 독이 들었나 안 들었나 왕의 음식을 미리 맛보는 기미 상궁. 맛있는 걸 많이 먹을 수는 있겠지만 <광해, 왕이 된 남자> <역린>처럼 암살 음모가 난무하는 시대라면 기미 상궁으로 일하느니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배 두드리는 편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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