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 아니 추상미가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커다란 눈동자만큼이나 시원한 목소리의 인삿말과 악수를 청하는 작은 손을 한꺼번에 내밀면서. 연극무대에서부터 몸에 밴 직선처럼 명쾌한 음색과 몸짓. 며칠 전 스크린 속에서 만났던 <생활의 발견>의 흐너적거리던 선영은 벌써 어디로 숨어버렸나. 몇 번 눈을 마주친 끝에 권태로운 유부녀의 일상을 깨뜨려준 ‘신선한 장난감’ 경수의 심장을 떨리게 했던 눈웃음. 그건 여전하다.
<꽃잎> <접속> <퇴마록> <세이 예스>에 이어 다섯번째 영화 출연작인 <생활의 발견>은 추상미에게 ‘복잡미묘한 연기의 발견’이기도 했다. 무명배우 경수의 1주일간의 짧은 연애담인 <생활의 발견>에서 추상미는 춘천의 여인 명숙을 뒤로 하고 떠난 경수가 기차 안에서 만난 경주의 여인 선영. 묘한 눈웃음과 진위를 알 수 없는 말로 경수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다음, 막상 뒤따라온 경수를 보고는 ‘웬일이세요?’ 하고 놀라는,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다.
<생활의 발견>에 대한 추상미의 두 가지 발견. 훌쩍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라는 면에서 즐거운 영화였다. 촬영지도 ‘수학여행의 고장’ 경주였고, 경주가기 전까지 영화찍는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선영을 위해 뭘 준비해야 하나요, 물어도 “그냥 푹 쉬다 오는 거야. 아무 생각말고 마음 비우고.”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비운다는 건 쉬운 듯 어렵고, 편한 듯 불편한 일. 그래서 단순한 생활을 하자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도닦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워냈다.
또한 ‘감독의 힘’을 발견했다는 면에서 값진 영화였다. 홍상수 감독은 자석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당기는 사람”이었다. 캐릭터에 대한 요구도, 영화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이 감독의 자장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사람이 술을 마시는지, 술이 사람을 마시는지 모르게 들이부어댔던 술자리들, 홍상수 감독과 사람이며 삶 등에 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면 ‘아, 이런 영화를 만들겠구나’ 하는 느낌이 스멀스멀 몸 전체로 기어올라와 문득 전율하곤 했다. 코를 찡긋한다든지 이마를 찡그리는 모습 등 소소한 습관 하나도 본래의 ‘추상미’를 포착하길 원했던 홍상수 감독에게 무의식적으로 동화되면서 조금씩, 완벽하게 선영이 되어갔고 일상과 연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달콤쌉싸름한 연기 체험도 했다.
“당분간 장르영화는 피하고 싶어요.” 악마의 제물이 될 운명에 처한 <퇴마록>의 승희며, 여행길에 우연히 부딪친 악의 화신 M에게 쫓기는 <세이 예스>의 윤희 등 그동안 맡았던 역들은 위기와 정면충돌하는 당찬 여성이었다. 그런 영화에 출연하면서 얻은 교훈은 영화가 장르의 특성을 잘 살리기 못했을 때, 배우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론 커버가 되지 않는다는 것. 한동안은 “<생활의 발견>에서 익힌, 일상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복잡미묘한 연기의 맛을 더 보고 싶고” 그럼으로써 도도하고 당찬 외면만이 아닌, 여리고 내성적인 면도 “관객에게 들키고” 싶단다. 아버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인 “배우는 대단한 직업”이라는 선입견을 가슴속에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