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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병든 자들의 사회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민소원(일러스트레이션) 2015-09-03

<액트 오브 킬링> <침묵의 시선>, 제때 정리되지 못한 과거의 출구 없는 현재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한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갈등의 양상은 다양하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충돌일 수도 있고 위계에 의한 소통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혹은 역사적 상흔을 두고 남겨진 자들 사이에 처리해야 할 사과와 용서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갈등이 없는 사회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어떠한 문제해결과정을 거쳐 이러한 갈등을 ‘다루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더불어 그런 문제해결과정이 사회 전반에 어떠한 학습치를 남기느냐가 중대하다. 거기서 한 사회의 수준과 격,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결정된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거기 갈등이 있는데 갈등이 없다고 치부되어버리는 사회에서 발생한다. 이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가해자가 지금도 여전히 힘 있는 가해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침묵으로 지워내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지금 우리가 들여다볼 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권위적인 교도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의회를 탄압하고 사실상 종신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그는 민족주의와 종교, 그리고 공산주의를 삼위일체로 하는 민족통일전선을 제창하면서 비동맹 중립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그의 공산주의 독재정권은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무너졌다. 권력은 수하르토에게 이양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폭력에 의한 정권 교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였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평범한 소시민들부터 노동자, 지식인, 화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판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끌려가 도살당하듯 생을 마감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시체 때문에 하수구가 막혔다. 이렇게 살해당하고 실종된 사람의 수가 300만명에 달했다. 그렇다. 300만명이었다. 그리고 저 당대의 살인자들은 지금 인도네시아의 유력한 지도층이다.

피해자인 채로 영원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애초 그 끔찍한 사건의 당사자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범죄자라고 생각하기보다 역사의 질곡 위에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던 영웅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TV 토크쇼에서 당시 공산주의자들을 어떻게 쉽고 빠르게 대량살상할 수 있었는지 자랑하고 사회자는 그런 출연자를 상찬하며 박수를 보내는 지경이다. 이대로는 다큐멘터리가 완성될 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본래의 계획을 틀었다. 그리고 살인자들 가운데 몇명을 주인공으로 해 당시 벌어진 일을 재현하는 영화를 찍어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공산주의자들을 죽였는지 자랑하며 기뻐한다. 사후세계로 간 희생자들이 자신들에게 고마워할 것이라 여긴다. 공교롭게도 등장인물 가운데 한명은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이 한 일이 끔찍한 범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물론 그 괴로움은 연기일지 모른다. 그리고 실제 연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아주 끔찍한 농담 같은, 거의 부조리극에 가까워 보이는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다큐 <액트 오브 킬링>이다. 실제 이해당사자들의 잔인한 연극으로 채워진 이 놀라운 다큐는 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이번에 국내 공개되는 <침묵의 시선>은 <액트 오브 킬링>의 정직한 쌍둥이 버전이다. 비교적 정공법으로 만들어진 이 다큐는 피해자 가족이 가해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현실이 덜 끔찍하게 다가오는 건 아니다.

주인공은 출장을 다니며 안경을 맞추어주는 일을 한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다. 형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학살당했다. 그는 학살에 동참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안경을 맞춰주는 척하면서 당시에 관련된 질문들을 한다. 물론 그들은 <액트 오브 킬링>의 출연자들이 그러했듯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되레 왜 그런 질문을 하냐며 화를 낸다. 혹은 당시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죽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봤는지 자랑한다. 아이들은 당대의 가해자이자 지금의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역사를 배운다.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투성이 역사를 배운 아이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빠르고 기술적으로 죽여준 살인자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TV 토크쇼를 보며 자라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사회는 저런 악순환 속에서 질식사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비추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현실에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건 <액트 오브 킬링>에 비해 <침묵의 시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교적 더 위악적으로 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한두명을 제외하면 <액트 오브 킬링>에서 살인을 자랑하는 자들은 정말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침묵의 시선>의 인터뷰이들은 상당수가 당시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은 화를 내거나 눈에 빤히 보이는 위악을 드러내 보이며 비명을 지르듯 당시 일을 자랑한다. 피폐한 자들의 가장 편리한 탈출구는 자조와 위악이기 마련이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촬영된 필름들을 틀어놓고 복기한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은 단 한순간도 입을 열지 않는다. 침묵으로 가득하다. 다만 그의 눈은 특정한 감정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참담한 빛으로 가득하다. 피해자로 사는 것, 아니 정확하게는 피해자인 채로 영원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의 처연함은 문자로 표현될 수 있는 감정의 경계를 벗어난다.

사과와 용서가 정체된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한국의 관객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죄의식을 위악으로 덮어버린 자들로 가득한 저 사회는 강력한 기시감을 이끌어낸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사회라는 화두는 우리에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난을 대물림받은 독립유공자 자손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현실은 광복절에만 눈에 잘 띄는 뉴스 꼭지로 선보인다. 딱히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의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친일파 자손으로 남들보다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라왔다. “우리 할아버지 친일파라서 원래 집에 돈이 많았어, 그래서 뭐”라는 위악 섞인 검은 웃음을 나만 해도 열두번은 더 들었다. 제때 정리되지 못한 과거는 대를 이을수록 그렇게 현실을 더욱더 공정하지 않게, 아프게, 속절없이 병들게 만든다.

사과와 용서가 정체된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앞서도 말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문제는 가해자를 승자인 채로 피해자를 패자인 채로 남겨두고 사회통합이라는 알량한 거짓말을 들어 침묵하고 지워버리는 태도에 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 공히 주장하는 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짊어진 사회는 반드시 곪아 부패한다는 것이다. 정당한 심판을 피해간 가해자는 그 어떤 이유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런 자들로 가득한 사회에서 이해받을 수 없는 부조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의 시선>에 등장하는 학살 가담자 가운데 한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조용히 질문에 대답하다가 어느 순간 수가 틀리자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한다. 왜 이제 와서 과거를 들추며 정치적인 질문을 하느냐. 자신을 겨냥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자들의 멘털은 늘 같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병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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