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기록자들
정희진(대학 강사) 일러스트레이션 김은희(일러스트레이션) 2015-10-27

조상과 관련한 두 가지 실화. 아는 학생이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다가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여권과 현금, 신용카드 등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가까스로 미국인 친구와 연락이 닿아 위기를 모면했다. 일단 며칠 굶은 한국 학생에게 미국 친구는 햄버거를 사주었고 한국인은 미국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때 미국인 왈, “괜찮아, 우리는 언제나 너희 나라를 도와주었잖아. 한국전쟁 때부터”.

얼마 전, 몽골에서 이주하여 한국 남성과 결혼한 여성이 많은 농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지역은 ‘코리안’보다 ‘코시안’ 아동이 많았고 노인들만 사는 동네에 몽골 여성들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 초등학생들이 고려시대 때 원나라의 침략과 삼별초의 난을 배우게 되었다. 한국 학생들은 이 ‘역사’에 분노하였고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며 몽골 어머니를 둔 친구들을 구타했다.

고려를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국가라고 볼 수도 없을뿐더러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개인은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한반도에 들어온 몽골인과 2000년대 남한으로 이주한 여성들의 사정은 정반대에 가깝다.

위 이야기들은 어이없음, 황당함, 분노 등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에게 묻는다. 국사란 무엇인가. 조상이라는 개념 때문에 몇 십년, 몇 백년이 지난 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편, 다른 편이 되어 원한과 감사의 감정을 갖게 되고 우리는 이를 당연한 역사라고 생각한다. 조상과 후손의 연속선은 사실일까. 민족이 먼저일까. 국가가 먼저일까. 조상님이 자랑스러운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국가는 민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가 출현하면서 민족 개념을 만들어냈다.

어느 나라나 내부 구성원의 삶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국사는 있을 수 없다. 합중국(合衆國)이나 연방(聯邦) 형태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 국민의 90%가 이슬람교도인 우즈베키스탄이 소련 연방에 속해 있었으니… 왕조 중심의 역사 기술을 비판하고 민중사, 여성사, 일상사 등 다양한 사관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역사가 과거의 기록이라면 우리는 역사를 알 길이 없다. 과거를 정확히 살아서 정확히 기록한 분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현재의 정세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승자는 역사를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다. 문제는 승자가 아니라 당대의 기록자들이다. 역사는 현재 승자이고 싶은 이들이, 자신을 과거의 승자와 동일시하고픈 욕망이다. 승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주장, 그것이 역사다. 국정교과서. 이들은 앞서간 독재자나 친일파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득세하기 위해 선배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상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후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