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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다 거짓말이다
손아람(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5-11-17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일 때 설득력을 가진다.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즉각적인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무의식은 거짓말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우리를 고통과 대면시킨다. 세계를 부정하는 으슥한 그늘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 이중부정의 윤리학을 펼친다. 그늘의 경계를 더듬어 빛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다 거짓말이야!” 누구도 그렇게 반박할 권리가 없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진실의 자격은 그렇게 해체된다. 이야기가 비난받는 때는 거짓말이 충분히 숙련되지 못한 경우다. 도저히 속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혀를 찬다. 이 작가는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거짓말은 통찰력의 산물이다. 거짓말이 불가능한 우주의 인간이라면 그 어떤 것도 통찰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세계는 겹을 이룬다. 세계는 세계를 부정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 거짓말은 거짓말 위에 세워진다. 에셔의 <그리는 손>처럼. 영화에서 벤츠 뒷좌석에 탄 기업 대표이사를 본 적이 있는가? 그 단역배우는 지하철 새벽 첫차를 타고 촬영장 구석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대기실에는 빈자리가 없다. 가진 건 몸뚱이뿐인, 가난한 주인공들이 휴식을 취하려면 여유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는 촬영이 끝나면 그들이 타고 돌아갈 진짜 벤츠가 세워져 있다. 관객의 폭소를 끊임없이 터뜨릴 감초 역할의 조연배우도 보인다. 큐 사인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는 철학자처럼 과묵하다. 대기실은 그에게 결코 거짓말의 공간이 아니다. 조연배우 옆에는 주연 여배우가 앉아 우울한 얼굴로 하소연한다. 세상은 그녀를 여신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그녀의 불만이다. 남자배우들처럼 멋들어진 대사 하나 없이 클로즈업 카메라에 반라의 몸을 바치라는 불공평한 요구에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인사성 바른 신인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데, 몇년 뒤에는 연출자가 저 아이를 주연으로 찾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껴서다. 현장의 독재자인 연출자가 배우들을 소집한다. 머릿속은 밀린 월세 생각으로 엉망이다. 촬영감독은 연출자에게 불만이 많지만 연출자로 승급할 생각은 없다. 올라가면 내려올 수 없는 막다른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 조감독은 공식 서열과는 달리 형편없는 경제적 대우를 받는다. 그는 통제되지 않는 보조출연자를 해고하겠다고 윽박지르며 스트레스를 풀어보는데, 봐달라고 애원하는 늙은 보조출연자는 하루 세탕을 뛰는 베테랑이라 꽤나 고소득자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몇명뿐이다. 중간 편집본을 확인한 투자회사가 촬영을 중단시켜 프로젝트가 휴지통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거품이 된 모든 거짓들도 모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분명히 해둔다. 오늘 늘어놓은 이야기 역시, 전부 거짓말이다. 내가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