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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누구를 위해 죽었나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5-12-29

말벌에 쏘인 적이 있다. 지방 촬영할 때였다. 촌놈 출신이라 웬만한 벌들에게 쏘이고 살아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결국 고꾸라져 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심장 근처에 쏘인 거라 한달을 고생했다. 그 지독한 첫 만남 이후, 말벌만 보면 괴성을 지르며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르게 도망치기 일쑤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말벌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된 건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면서 개체 수가 점점 증가하고 아열대에 살던 검은등말벌이 확산되고 있다. 요즘 겨울에 시골에 내려가면 꼭 하는 일이 있다. 용감한 막내 매제를 앞세워 시골집 처마의 작은 말벌집들을 태우는 일.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전국에 걸쳐 말벌 신고 횟수와 사망률과 소방서 출동 건이 매년 껑충껑충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닥치는 대로 꿀벌을 잡아먹고 꿀을 훔치는 검은등말벌 때문에 국내 꿀벌의 10% 이상이 사라졌다. 꿀벌들이 사라지는 대신, 말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성하는 이 께름칙한 풍경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불길한 징후다. 그러나 맨 앞에서 그 말벌들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방관들이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또 한명의 소방관이 말벌에 쏘여 숨진 사고가 일어났다. 여러 차례 쏘여 2시간 만에 쇼크로 숨졌다. 하지만 인사혁신처는 유족의 ‘순직’ 승인 요청을 기각했다. 말벌 제거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서 소방관들이 제대로 된 벌집제거용 장비도 없이 양파망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농업용 고무장갑을 낀 채 치명적인 맹독을 지닌 말벌들과 사투를 벌이도록 내버려두고 있나 보다.

한 나라의 안전시스템은 ‘소방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 소방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구멍난 장갑, 양파망, 일반인보다 더 높은 암사망률, 사고사보다 더 많은 자살, 열악한 근무조건 등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경찰들의 시위 진압용 장비는 나날이 첨단으로 진화하는 반면, 소방관들은 화재진압용 장갑을 자비로 사야 하고, 때론 면장갑을 지급받기도 한다. 말벌이 위험하지 않다고 순직 요청을 거부한 인사혁신처는 세월호 직후에 세워진 조직이다. 관피아를 척결하고 국가안전시스템을 보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지만 공무원 뽑을 때 ‘<애국가> 4절’을 부르게 하는 것 외에 그 어떤 진전된 행보도 보이지 않고 있다.

어쩌면 저 외로운 소방관의 죽음은 여기 한국이 말벌의 왕국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 청문회에 대한 철저한 무시가 보여주듯 안전시스템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최악의 노동조건을 호소하는 소방관들의 눈물은 애써 외면하고, 꿀벌들의 노동력을 훔치기 위해 노동법 개악이나 하고 있는 저 위험한 말벌들이 지배하는 사회 말이다. TV에 나와 연일 노동법 개악하라고 윽박지르는 저 얼굴들, 자꾸 말벌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