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개와 우리
한유주(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6-01-19

나이 든 사람들의 개는 뚱뚱한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외롭기 때문에 개에게 먹이를 지나치게 많이 준다는 거였다. 나와 9년을 같이 사셨던 할머니는 틈만 나면 내게 먹을 것을 주셨지만 나는 딱히 할머니가 외롭다고 생각지 않았다. 실은 잘 모르겠다. 굳이 나이가 많지 않더라도 로봇 청소기에 말을 거는 사람들은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청소기에 먼지가 아니라 음식을 먹이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는 늘 개를 길렀다. 이상하게도 가족들이 전부 개를 좋아했다. 그 덕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몇년 전까지 늘 개와 함께 지냈다. 개는 일종의 접착제 구실을 했다. 할 말이 없는 사이라도 개를 기른다면 얼마든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내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세 마리의 개를 동시에 키운 적도 있다. 주워오거나 얻어온 개들이었다. 개들은 차례대로 죽었다. 지금은 한 마리만 남아 막내이자 적장자의 구실을 하고 있다. 가족들의 카톡방에서는 늘 이 개의 사진이 전송되는 중이다. 나는 가끔 우리가 이 개 때문에 적당히 잘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는 한다.

개는 사람의 발치에서 잠을 잔다. 그래서 명절날 가족들이 모이면(그래봤자 네명이 최대 인원이다) 개를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 내 발치에서 잠을 청한 개가 다음날 일어나보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개의, 혹은 가족의 습성 때문에 얼마 전 아버지가 다치셨다. 침대에서 떨어질 뻔한 개를 구하다 아버지가 떨어지셨다는 거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수긍이 가는 얘기였다. 나라도 개보다는 내가 다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가 자세를 교정하고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평가하셨다.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수긍이 가는 얘기였다.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개란 뭘까. 이 개가 없다면 나의 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외로움을 떨쳐낼까. 로봇 개를 수리해주는 일본의 기술자들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로봇 개를 안아든 사람들의 모습 위로 자연스레 나를 비롯한 여럿의 미래가 겹쳤다.

몇년에 한번씩 수명을 다한 개들이 죽을 때마다 아버지는 삽으로 개를 묻었다. 아버지의 차 트렁크에는 지금도 삽이 들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 기르는 개가 죽으면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되풀이하신다.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