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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주세요] 시간이 많지 않다
이병헌(영화감독) 2016-04-25

이병헌 감독(<힘내세요, 병헌씨> <스물>)

*<씨네21>은 1049호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지지 캠페인을 매주 실을 예정입니다. 이주의 지지자는 영화 <스물>의 이병헌 감독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주요 배경으로 전작 <힘내세요, 병헌씨>(2013)를 연출했던 그는 영화제가 신인감독에게 어떤 기회를 선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화인입니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영화 <스물>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병헌 감독(오른쪽).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그래, 그래보자 결심했다.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두고 내린, 부모님 입장에선 참 어처구니없는 그 결정 탓에 남부러운 삶이 시작됐다. 부러울 게 얼마나 많겠는가? 지금도 앞으로도 열등감을 버텨야 살 수 있는 직업을 선택했거늘. 어쨌든 영화를 시작한 그 무렵부터 비슷한 입장의 문화잉여들과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갔다. 물론 초대를 받아 간 건 아니었다.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영화인이라 소속 시키고 상대적 박탈감을 의도적으로 주입한 후 그것이 철학적 정신의 근본이라 여기며 술맛을 키웠다. 예술인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그게 더 간지나는 것만 같았던 그 치기어리고 부끄러운 기억이 지금 내게 왜 이리 귀중하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를 만들어보기나 할 수 있을까? 완성한다면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는 있을까? 막연하기만 하던 그 시절에 영화제는 가장 선명한 기회의 이미지였다. 저기 선명하지만 멀고 먼 목적지를 통과하는 것보다 달리고 있는 것 자체가 좋았고, 좋다. 그것으로 버틴다. 영화를 시작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화제는 여전히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고맙다.

지금부터는 좀더 당당히 모두의 것인 영화제를 망치고 있는 직원들을 꾸짖으려 한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느끼는 이유는 난 영화인이기 전에 영화 팬이기 때문이다. 보다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으로서, 대한민국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문화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당선을 호소하던 때 서병수 시장 뒤에 병풍처럼 따라다니던 ‘문화로 융성하는 부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선거용 현수막에 테스트 샘플용으로 쓰인 잉크 자국 정도였나 싶다. 영화제의 존립과 유지는 절대적인 독립성을 담보로 하며 영화의 선택은 프로그래머 고유권한이어야 한다. 그 권한을 박탈하려 할 경우 가장 먼저 어떤 세력이 어떤 불순한 의도로 개입하려 들지 현재 사태가 증명하고 있다. 영화는 영화인이 만들고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이 한다. 행정인은 보다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관람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문화를 지탱하는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국민이 고용한 일꾼이다. 음식점의 고용인은 메뉴를 정할 수 없다. 다만 친절하고 청결하게 가게를 유지하려는 고용주의 노력에 일조하고 더 많은 손님이 찾아올 수 있도록 노동력을 제공하여 그에 따른 보수를 받는다. 그러한 본분에 충실한 이후에 메뉴와 경영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의견을 제시한다면 고용주와 손님은 그 직원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하고 있는 직원은 갈 곳이 많은가보다. 집안에 돈 많은 누나라도 있나? 지금도 충분히 받고 있지 않나? 최저임금 6030원 시대에 억대 연봉을 받고 있지 않나.

아직 가게 밖에 많은 손님들이 줄 지어 서 있다. 번호표 나눠줘야 할 직원이 메뉴가 맘에 안 든다고 가게를 부수고 있다. 밖에서 다 보인다. 부탁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제발 멈춰주길 부탁한다. 잘못을 인정하기엔 너무 멀리 와서,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서, 쪽팔려서 아닌 걸 알면서도 버틴 적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 끝이 인정과 사과라면 비난이 아닌 용기로서 포용할 수 있다. 그 용기는 세계영화의 부산 엑소더스를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보인다.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함께하고 싶다. 말살이 목적이라는 생각은 너무 섬뜩해서 하고 싶지 않다. 영화제는 10월이다. 숙고할 만한 시간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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