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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필립 그랑드리외 회고전 미리보기

회고전 ‘필립 그랑드리외: 영화언어의 재발견’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필립 그랑드리외 감독.

<밤임에도 불구하고>는 필립 그랑드리외의 이례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그의 최신작이다. 그리스계로 프랑스에서 맹활약 중인 여배우 아리엔 라베드(<아텐버그> <더 랍스터>)와 록산느 메스퀴다가 공동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다층적으로 얽히는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나 장르의 프레임을 입힌 드라마의 전개가 통념적인 서사영화의 꼴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내러티브의 말미에 다다른 극중 한 장면에서 아리엔 라베드가 연기하는 간호사 헬렌과 그의 연인인 가수 렌스는 범죄세계의 덫에 걸려 스너프필름을 찍게 된다. 검은 가죽 마스크로 얼굴을 통째로 가린 헬렌은 짐승 같은 무뢰한의 가혹한 고문에 절명하고 만다. 범죄조직의 또 다른 일원이 이 살풍경의 현장을 태연하게 카메라로 찍고 있다.

<밤임에도 불구하고>는 전작(全作)을 통해 드러난 필립 그랑드리외 스타일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그랑드리외는 여기서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미지의 리듬에 대한 감각, 영화적 지각의 고유한 특성을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극단적으로 어두운 조명과 추상화된 육체, 현실에 대한 필터링을 통해 물리적인 리얼리티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비전을 전편에 불어넣고 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단출한 스토리를 통한 ‘우화’의 형식을 취한다. 동화나 우화에서처럼 그의 서사는 단순한 패턴을 반복한다. 여자를 표적으로 한 연쇄살인마와 한 여인의 교감을 다룬 <음지>, 전쟁의 참화를 겪은 미국인 병사와 창녀의 강박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삶>, 헨젤과 그레텔의 느슨한 변주라고 할 수 있는 <호수>, 거대한 악의 세계로부터 사랑을 지키려는 연인의 고투를 다룬 <밤임에도 불구하고>는 모두 불통과 소외의 기운이 인간을 집어삼킨 시대의 우화이다.

재현의 영화에 대한 거부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회고전 프로그램 ‘필립 그랑드리외: 영화언어의 재발견’을 통해 소개되는 필립 그랑드리외의 8편의 노작은 급진적인 이미지 탐험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랑드리외는 지금까지 네편의 극영화와 두편의 다큐멘터리, 두편의 실험영화를 만들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화이트 에필렙시>와 <위협>은 인스톨레이션 퍼포먼스 버전과 필름 버전으로 동시에 작업한 그랑드리외의 ‘행위 3부작’에 속한다. 극영화 데뷔작 <음지> 이후 그랑드리외는 동시대 영화 작가 중 가장 대담한 모험가로 지목되었다. <음지>는 종래 영화의 관습을 난도질하는 담대한 서사와 급진적인 스타일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다. 시공을 짐작하기 힘든 황량한 공간에서 오로지 인물들의 육체만을 가지고 진행되는 <새로운 삶>, 사랑에 빠진 남매를 통해 도덕적 판단 이전에 순수한 감정을 소유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호수>는 윤리적 가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담대한 세계관으로 비판과 지지의 반응을 극명하게 양분시켰다.

그랑드리외의 영화가 논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서사영화의 유습을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랑드리외는 극영화일지라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없는 혼란의 상태로 시작한다. 이를테면 <음지>의 오프닝은 폭력적인 인형극을 보면서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엔딩은 ‘투르 드 프랑스’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두 장면의 맥락은 어떤 형식으로든 설명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의 도입 시퀀스는 맹렬하게 도끼질을 해대는 주인공 알렉시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길게 찍는다. 인물에 밀착한 카메라는 날카롭게 육체를 잘라내면서 팽팽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인물들의 행위와 그들이 벌이는 사건은 심리적인 원인을 추정하기 힘든 상태로 던져진다. <음지>의 연쇄살인자 장, <새로운 삶>의 소외된 미국인 병사, <밤임에도 불구하고>의 자기파괴적인 주인공들은 그들의 됨됨이나 심리적 동기, 의미를 추론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미니멀한 플롯 구조 안에서 비슷한 성격의 인물들이 만나고 섹스와 폭력이 뒤를 따른다. 이 세계 안에는 어떤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랑드리외가 서사의 논리를 등한시하는 바탕에는 ‘재현의 시네마’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간단한 구조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미스터리한 측면을 강조하면서 시각언어의 급진적인 조형을 통해 불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캐릭터들에게 아무런 성격을 부여하지 않고, 심리적 정황도 그려내지 않으면서 작동하는 이야기는 지각과 감각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랑드리외에게 ‘드라마’는 시각적 비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대신 모든 숏은 강력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시각적인 기교가 정신을 앗아가는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앞뒤를 알 수 없는 정황의 한가운데로 관객을 밀치고 급작스럽게 커팅한다. 이미지의 결을 인식하도록 만들면서 모든 숏이 하나의 사건이고 코멘트가 되도록 만든다. 이미지 세공술은 따라서 매우 정교하다. <호수>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 아다치 마사오의 초상> <화이트 에필렙시> <위협> 등에서 감독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든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비전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독창적인 룩이나 비전,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 대담한 지각의 모험은 이미지의 왜곡과 떨림, 깜빡임, 빛과 포커스의 조작, 프레임 안과 바깥의 활용방식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모든 영화에서 급진적인 사운드 운용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대사는 최소화되고, 음악은 앰비언스 효과를 일으키면서 과장, 왜곡, 강조된다. ‘떨림과 진동’의 영화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불안을 가중시키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세계와 화합할 수 없는 이들의 격정적인 삶을 표현한다. 카메라는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격렬하게 깜빡인다. 단일하고, 연속적인 숏 안에서조차 일률적이지 않은 떨림, 이미지를 휘감는 노이즈와 다층으로 설계된 사운드, 거대한 박동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형식적인 선택 또는 스토리,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구상된 이미지 언어는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의미를 가진다. 같은 아이디어나 같은 감정을 곱씹지 않으면서 시네마의 새로운 지각방식을 탐구한다.

육체와 언어의 탐구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비관적이고 어두운 비전 때문에 필립 그랑드리외에게는 ‘악동’의 이미지가 씌워졌다. 그가 사회적 질서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의 갭을 통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여기서 부상하는 것이 ‘육체’이다. 그랑드리외는 극소량의 빛 아래서 추상적인 육체와 얼굴, 표정을 찍는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우리는 현존하는 육체와 감정을 보게 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그랑드리외는 브루노 뒤몽이나 가스파 노에, 장 클로드 브리소, 미하엘 하네케 등과 함께 섹스와 폭력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뉴 프렌치 익스트리미즘’의 조류로 범주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과 그랑드리외 영화의 유사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과 달리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주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어둡다. 표현에 있어서 극단주의를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면 제각각의 방식으로 육체를 다룬다는 것이다.

필립 그랑드리외는 육체와 그 동력이 영화적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세계에 대한 놀랄 만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삶>은 어딘지 알 수 없는 황량한 공간에서 오로지 인물들의 육체만을 가지고 진행되는 영화다. <화이트 에필렙시>와 <위협>에서 육체는 ‘대상성’을 상실하고 추상화된다. 추상화를 향한 지향은 근작으로 올수록 더 강해지고 있는데, 대상의 본성을 박탈하고 그 형태와 리듬, 질감으로 그것을 대체한다. 2010년 이후 그의 작업이 필름을 넘어서 비주얼 아트의 영역을 포괄하면서 박물관과 갤러리의 고려 대상이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 그랑드리외의 육체에 대한 비전은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태곳적의 기운을 품은 벌거벗은 육체를 언어화한 이 영화들은 감정적인 흥분과 분열증, 환각, 고통을 느끼게 한다. 헐벗은 육체의 이미지는 물질로서의 육체를 벗어나 보여주기의 형식, 재현의 대상으로만 의미를 가진다. 두 영화에서 육체는 변형되어가고, 뭉개지며, 어둠(밤) 속으로 사라지고, 거대한 형상으로 다시 나타나며, 과장된 톤으로 덧칠된다. 이미지의 변형적인 힘은 그 리듬과 속도, 질감으로 극대화된다.

필립 그랑드리외는 영화가 인간심리에 대한 설명이나 도덕적인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관념을 공격한다. 대신 관객이 육체적으로 반응하는 영화를 찍는다. ‘헐벗은 삶’을 주제로 한 두편의 영화인 <화이트 에필렙시>와 <위협>에서, 그리고 <밤임에도 불구하고>에서 육체의 움직임은 이미지가 수행하는 모든 기능의 중심이다. 섹스를 다루면서도 에로틱하지 않은 이 영화의 장면들에는 다분히 스너프(snuff)적인 요소가 있다. 카메라는 가련하게 학대당하는 육체를 집요하게 보여줌으로써 행위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에 대해 코멘트한다. 사창가에서 소녀를 학대하는 미군 병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새로운 삶>은 폭넓게 확장된 그랑드리외의 시각적인 비전을 형상화한다. 항문성교를 하며 여자를 학대하는 장면에서 그랑드리외는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 다채로운 시각적 스타일을 구사한다. 페이드와 과다노출을 사용한 이 장면에서 남자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행한다. 춤을 추는 여자는 프레임에 조금만 걸쳐 있다. 여자의 얼굴 중심에는 어둠이 어린다.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하나의 ‘풍경’처럼 다루어진다. 인간은 풍경 속에 놓인 형상, 또는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 순간 ‘영화’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 된다.

상영작 안내

<사라예보로의 귀환>(1996)

프랑스 문화예술 채널 <아르테>가 기획한 프로젝트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을 피해 프랑스로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가족을 따라잡는다. 사라예보행 버스에 탑승한 그랑드리외는 300km에 달하는 여정을 횡단하면서 폐허의 풍경을 수록한다. 사라예보의 정황에 대한 대화 너머로 보이는 난민캠프와 공동묘지, 부서진 집들이 전쟁의 의미를 묻는다.

<음지>(1998)

흡혈귀처럼 창백한 남자 장은 연쇄살인자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는 희생자들의 목을 졸라 교살하는 그는 어느 날 죽이고 싶지 않은 여인을 만난다.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가는 <음지>는 그랑드리외 영화의 주요한 특징을 정초한 작품이다. 심리를 초월한 캐릭터들, 비등점까지 치솟는 시각적 긴장감, 영화적 지각의 혁신이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새로운 삶>(2002)

어떤 새로움도 찾을 수 없는 이 영화에 ‘새로운 삶’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사라예보 전쟁에서 돌아온 무기력한 미국인 청년과 신비로운 창녀의 강박적인 사랑을 묘사한 <새로운 삶>에서는 <음지>를 통해 드러난 관계의 파탄상이 심화되어 나타난다. 심리적 동기가 생략된 모호한 서사와 도덕관념의 파괴, 이미지와 사운드의 실험적인 형식이 어우러진다.

<호수>(2008)

호수 근처의 격리된 집을 배경으로 알렉시와 여동생 헤제의 내밀한 관계를 다룬다. 욕망과 질투, 순결의 상실, 혼란스러운 도덕관념을 묘사한 <호수>는 원시적인 숲속 공간을 인물의 심리와 연결짓는다. 핸드헬드와 대담한 클로즈업의 사용, 정교한 미장센과 조명으로 이미지 직조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 아다치 마사오의 초상>(2011)

일본의 반체제 혁명 운동가이자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인 아다치 마사오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영화. 전기적 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달리 이 영화의 주제는 정치와 영화, 세상과 예술의 관계다. 혁명과 예술에 투신하여 그 둘을 한몸으로 생각했던 한 남자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아름다움’의 본성에 관한 대화록이다.

<화이트 에필렙시>(2012)

<화이트 에필렙시>는 필립 그랑드리외의 이미지에 대한 탐험의 절정이다. 벌거벗은 몸의 뒤태를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신체와 섹슈얼리티의 관계, 공포를 자아내는 화면, 완만한 리듬의 장면전환 등 지극히 낯설어 보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전작들을 통해 강조된 육체의 형상으로 빚어진 이미지와 감각의 관계, 영상과 사운드의 독창적인 조합을 재연하고 있다.

<위협>(2015)

필립 그랑드리외의 행위 3부작 중 <화이트 에필렙시> 이후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 그랑드리외의 말에 따르면 <위협>의 테마는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을 느린 속도로 촬영한 이미지는 의도를 추론하기 힘든 벌거벗은 상태의 감정과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신체로만 표현되는 이미지 조형으로 새로운 체험을 안긴다.

<밤임에도 불구하고>(2016)

뮤지션 렌스는 마들렌이라는 여인을 찾다가 간호사 헬렌과 사랑에 빠진다. 어린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시달리는 헬렌은 범죄조직의 포르노업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음습한 기운이 지배하는 <밤임에도 불구하고>는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랑드리외는 날것 그대로의 음욕과 감각적인 이미지로 신체에 대한 탐구를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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