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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스페셜] “시선을 마주치고 외면하고 하는 순간들이 중요했다” - 박찬욱 감독 인터뷰
김성훈 2016-05-23

*이 인터뷰는 국내 매체 라운드 테이블과 칸 공식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들을 정리했습니다.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아가씨>를 함께 제작한 용필름 임승용 대표로부터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처음 건네받았을 때 소설의 어떤 면모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나.

=특정 장면이 끌어당겼던 것 같다. 시간이 오래 지난 까닭에 원작의 어떤 장면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되게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있었다.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갈 때 드라마를 끌고 가는 주체가 바뀌는 것도 좋았다. 서사의 주체와 객체가 드라마 안에서 뒤바뀌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남북한 병사들이 같은 상황을 각기 다르게 묘사했던 <공동경비구역 JSA>나 서사의 주체가 바뀌는 <복수는 나의 것>도 그런 맥락에서 풀어나갔던 작품이었다. 또 관객이 이미 본 장면인데, 그 장면이 다시 나올 때 다른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게 되는 설정도 재미있었다.

-원작 소설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각색하려고 했나.

=소설이 워낙 흥미진진한 통속소설이나 TV연속극의 외양을 띠고 있지 않나. 그게 세라 워터스의 의도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젠틀맨’(영화에서는 하정우가 연기한 백작.-편집자)을 포함한 소설 속 등장인물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면 되겠다 같은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야기의 배경은 1930년대 한국과 일본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제작자 임승용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소설이 그랬듯이 원래는 영국을 배경으로 쓰려고 했었다. 하지만 <BBC>가 3부작 드라마 <핑거스미스>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원작과 좀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사람이 만든다면 원작과 다른 갈등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임 대표가 신분제도와 영화 속 정신병원 같은 공간이 존재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일제강점기로 바꾸니 원작이 가지고 있는 설정보다 더 많은 레이어가 서사에 생겨나게 됐다.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1930년대를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때가 식민지 시대의 지배층, 상류층 사람들이 ‘세상은 일본 것이다’라고 인식했던 시기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식민지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시기이기도 하다(역사적으로 1930년대는 내선일체를 식민지 통치의 전면에 내세운 시대였다.-편집자).

-영화 속 1930년대는 한국, 일본, 서양 문화가 혼재돼 묘사된다.

=1930년대는 스타일리시하고 멋진 무언가를 창조하기 좋은 시대라고들 하는데 내 관심은 그런 건 아니었다. 한국, 일본, 서양 문화가 함께 모여서 생겨나는, 낯선 이미지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했다. 가령 일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도 하인들의 숙소는 한국식으로 되어 있고, 일식 건물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고, 서양식 건물에 들어갈 때는 신을 신고 들어가는 등 이런 설정은 당시 동양의 근대화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영화를 한번 더 봐야 한다는 것이다.(웃음)

-<아가씨>는 감독의 전작을 통틀어 대사가 가장 중요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히데코, 숙희, 백작 등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쓰는데, 그때 인물의 진심과 거짓말이 드러난다.

=진실과 거짓말을 기준으로 대사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구분한 건 아니다. 상황에 맞게 적절한 언어를 선택했다.

-히데코 역에 김민희를 캐스팅한 계기는 무엇인가.

=<화차>(2009)를 보면서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냥 훌륭한 배우가 아니라 충격적일 만큼 성장한 배우다. <아가씨>를 편집한 김상범 편집감독이 (김)민희씨의 초기작인 <서프라이즈>(2002)를 편집했었다. 그가 민희씨를 두고 <서프라이즈> 때 그 배우와 같은 사람인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정말 놀라워했다. 처음부터 타고난 천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 역시 그렇지 않나. 처음 두 영화가 망한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민희씨의 성장을 높이 샀고, 그녀의 연기를 좋아했다. 아, 민희씨는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스러운 모습이 있다. (김)태리는 강아지상이고. (웃음)

-전작 <스토커>에 이어 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한명의 여성 캐릭터가 서사를 끌고 가는 <스토커>와 달리 이번에는 여성주인공이 두명인데.

=아내와 딸, 두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여자를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탄하는 사람으로서 여자가 둘이면 하나보다 더 좋다. 셋이면 더 좋고. (웃음) 칸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이런 구절이 있더라.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여성적인 섬세함이 발견되는 법이다. 내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나이가 들고, 딸을 키우면서 내 안의 여성적인 면모를 더 느끼게 되고, 관심이 가게 되더라. 여성이 혼자 나와 어떤 남성과 관계를 맺어 무언가를 벌이는 것이 흥미로울 때도 있지만, 상반된 배경과 성격을 가진 두 여성이 등장할 때는 주류 상업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재미가 막 생긴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말이다.

-원작과 가장 다른 등장인물은 백작과 코우즈키, 두 남자인 것 같다.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목한 건 히데코, 숙희 두 여자를 둘러싼 백작과 코우즈키, 두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원작에서도 젠틀맨과 삼촌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지만, 두 남자의 비중이 더 늘어나고 확장될 때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큰 대비가 생긴다. 그래서 원작의 젠틀맨과 삼촌의 비중을 대폭 키워서 다채로운 팔레트를 만들고 싶었다.

-진실과 거짓말이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라 등장인물, 특히 히데코와 숙희 두 여성의 시선 교환이 중요했을 것 같다.

=애초에 <아가씨>를 3D영화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등장인물간의 시선 연출 때문이었다.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갈 때 서사의 주체가 숙희에서 히데코로 변하지 않나. 이런 성격의 이야기를 입체영화로 만든다면 입체값을 변경해 인물간의 거리감을 조절할 수 있다. 가령 1장에서 두 인물이 대화할 때 거리감이 가깝게 느껴진다면, 2장에서 굉장히 멀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다.

-3D영화가 아닌 까닭에 시점숏을 담아내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다. 특정 순간에 카메라가 아주 미묘하게 흔들리는 순간이 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담아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가 외면하고, 마주치는 게 두려워서 시선을 피하고, 그런 짧은 순간들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히데코와 숙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수위가 꽤 센데, 배우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배우 본인들이 대답하겠지만, 이미 시나리오에 동성애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배우들에게 원작 소설을 던져주고 할래, 말래 그런 게 아니다.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읽고, 할 거다, 안 할 거다 결정만 하면 된다.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젯밤 프리미어 상영을 마쳤다. 만족하나.

=칸 마감이 지난 4월 말이라 영화를 완성한 지 얼마 안 됐다. 칸 오기 직전까지 색보정, 음악을 만졌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다. 영화를 수백번 봤는데 기술적인 문제를 보완하는 쪽으로만 신경 썼다. 믹싱실에서는 사운드 중심으로, 색보정할 때는 화면색을 중심으로 봤으니 영화를 온전히 감상할 수 없었다. 프리미어 상영은 기술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고 처음으로 영화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상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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