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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돌아온 지갑
노덕(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6-06-01

지갑이 없어진 걸 안 것은 택시에 탄 뒤였다. 순간 택시비 생각에 막막했지만 친절한 택시 기사는 냉큼 찾으러 가보라며 요금 따윈 운운하지 않고 바로 세워주었다. 지나온 궤적을 따라 걸으며 지갑을 찾았지만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고 너무 어두웠다. 검은색 지갑이 눈에 띌 리 없었다. 지갑을 포기하고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장소로 갔다. 후배를 택시 내리는 곳까지 오게 해서 계산을 시키고 지갑 잃은 상실감을 핑계로 술을 퍼마셨다. 어차피 지갑이 없어 술값도 내 몫이 아니니 맘 놓고 술이 잘 들어갈 수밖에. 우연히 만난 배우 일행과 합석을 했다. 그날따라 왜 그랬을까. 평소라면 무례한 발언에 허허실실 넘어가는데 예민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내쪽에서 걸고넘어졌다. 일행 중 섞여 있던 초면의 남자가 날 얼마나 안다고 본인의 여자 후배들에게 하듯 꼰대짓을 하기에 노골적으로 욕지거리를 해주자 그제야 당황한 주변인들에 의해 자리가 정리됐다.

속도 아프고, 지갑 생각에 하루 종일 우울했다. 현금은 얼마 없었고 카드도 재발급받으면 되는데 무엇보다 도장 8개 찍은 만화방 쿠폰이 가장 뼈아팠다. 일주일 전쯤, 여자화장실에서 지갑을 주운 일이 기억났다. 지갑 주인은 이제 막 스무살이 된, 맑아 보이는 친구였다. 현금도 불쌍할 정도로 없어서 별다른 내적 유혹 없이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었다. 늘 그랬던 것 같은데. 분실물을 발견하면 주인을 찾아주거나 공공기관에 맡겼는데 정작 내 것을 잃어버리면 내 손에 돌아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빌어먹을 세상.

그렇게 우울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카드사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서에서 내 연락처를 몰라 카드사로 연락을 취했단다. 청계천에서 내 지갑을 주운 행인이 경찰서에 맡겼다고 했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인상착의를 확인하니 잃어버린 내 지갑이 확실했다.

잃어버린 지 꼬박 24시간이 지나 서소문파출소에서 지갑을 찾았다. 안에는 동전 한닢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종 영수증에 꼬깃꼬깃했던 지폐들이 곱게 정리까지 되어 있었다. 지갑에 현금이 10만원도 넘게 있었단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만화방 쿠폰까지 아름답게 정열되어 있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파출소에서는 지갑을 찾아준 귀인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인사라도 하라며. 인사뿐이랴. 그가 내 또래 여성이라는 정보에 난 꽤 고가의 핸드크림 세트를 기프티콘으로 보내주었다. 아름다운 손은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하니까.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며 되레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결국 못난 모습을 보인 건 나뿐이었다. 택시 기사부터 후배에 배우분과 (꼰대짓한 분은 제외하고) 지갑 찾아준 귀인까지. 인간적이고 상식적일 일화가 희귀한 세상에 마무리까지 완벽한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돌아온 지갑 얘기를 듣고 후배가 축하해줬다. 이 정도 일에 아직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끼는 게 맞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축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