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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잠들기 전에

언젠가부터 저녁 약속이나 일이 없어 바로 귀가한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TV에 흥미를 잃은 지는 오래되었다. 대개 컴퓨터에서 메일을 확인하고, 궁금한 사항을 서핑해보며,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살펴본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한다. 그것마저 마치거나 심드렁하면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쳇말로 그냥 멍때리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자연히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된다. 창으로 스며드는 이웃의 불빛들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피곤하지도 않은데 잠을 청하였으니, 바로 잠에 빠져들 리가 없다.

그런 밤이면 우주의 빅뱅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지금 이 방에 누워 있는 시간까지 차례로 더듬어본다. 긴 시간의 연쇄 속에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지를 헤아려본다. 빅뱅, 은하의 형성, 초신성의 폭발, 지구와 생명의 탄생, 진화와 문명, 역사의 전개 그리고 지금 여기에 누워 있는 나. 눈부시게 발달한 학문과 책은 나같은 문외한에게조차 “이 우주 만물이 왜 존재하는지” 외에는 모두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한다. 나는 안심한다. 그것이 지루해지면 내가 저글링하고 있는 인생의 과제들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본다. 건강, 경제, 변호사 업무, 영화 일, 교육, 공부, 삶의 의미. 그중에 특별한 위험신호가 없으면 나 역시 안도하며 차츰 잠에 빠져든다.

어떤 밤에는 살아온 기억들을 더듬어본다. 그 기억들은 내 마음속에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와 골짜기와 해안을 이루고 있다. 그 풍경들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걷거나 부드럽게 공중을 날기도 하며 살펴본다. 나는 현재의 지식과 경험과 깨달음에 비추어 풍경들을 음미한다. 그러다가 가끔 명백한 기억의 오류를 발견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해 그 기억이 성립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왜 그런 잘못된 기억이 남게 되었는지 알아내기도 하고, 그것까지는 실패하기도 한다. 더러는 풍경의 의미가 바뀐다. 젊어서 외국을 여행할 때 길을 묻는 내게 외국인이 뜬금없이 화를 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배운 외국어 지식에 의해 그가 내게 다급하게 했던 말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잠시만 기다려요”라는 말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를 흘겨보며 떠나지 않았어야 했다.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다거나 상대의 잘못이라고 기억하는 중요한 순간들 중 몇번은 내 잘못이었다.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던 못난 내가 자기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그대들이여.

기억의 순례 중에 가장 난처한 것은 긴 시간 확신했던 신념들의 허구성을 발견할 때다. 믿고 의지했던 거대한 개념이나 서사가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지난 인생의 태반을 부정해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시대와 진보, 사랑과 정의 따위의 거창한 이야기와 결부된 신념이 흔들릴 때면 살아온 인생도 휘청한다. 이제라도 깨달은 게 다행일까. 아니, 이 깨달음은 또 얼마나 세월을 견딜 수 있을까. 이런 날에는 순례와 번민을 거듭하다가 어느새 푸르스름한 새벽에 이른다. 나는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서 남산 자락의 부지런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빈 하늘을 가득 메우는 오래된 지저귐을 아침이 올 때까지 듣고 또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