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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좀비물을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안타깝도록 얄팍한 ‘아저씨화’

<부산행>

1970, 80년대 한국 호러영화들을 보면 “이 사람들, 정말 해머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시 유행한 긴 머리 여자 귀신 나오는 영화들을 보라. 대충 보면 조선시대스럽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들 커다란 드라큘라 이빨을 달고 있고 툭하면 지나가는 과객을 문다. 그들이 흉내냈던 건 해머 영화만이 아니었다. 로저 코먼 영화들, 60, 70년대 유로 트래시 영화들, 유니버설 영화들, 물론 일본 호러물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한국 호러영화는 대부분 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의 재료로 만들어졌고, 한국 호러영화의 역사는 아직까지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토착화의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왜’와 ‘어디에서’에 신경 쓰지 않는 장르적 특징

최근 들어 이 토착화의 과정이 점점 쉽고 짧아지고 있다. 그만큼 세계가 평준화되고 장르가 현대화된 것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호러는 오로지 머나먼 유럽의 고성을 무대로 한 고풍스러운 장르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70년대의 한국영화 감독이 유럽을 무대로 한 해머 영화를 원본으로 작업하려면 배배 꼬인 타협과 재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좀비영화를 만들 때는 그 과정이 거의 생략된다.

현대 호러영화 세계에서 좀비영화가 이렇게 인기를 끄는 이유도 이 설정의 무국적성에 있다. 좀비영화의 특성 중 하나는 아무도 ‘왜’와 ‘어디에서’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그 ‘왜’는 정부의 비밀 실험일 수도 있고, 부두교의 저주일 수도 있고, 분노 바이러스 때문일 수도 있다. ‘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어디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갑자기 뜬금없이 죽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살을 뜯어먹거나 그들을 자기와 같은 부류로 만든다는 거다.

연상호의 <부산행>도 이런 수월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바이오 어쩌고 하는 회사에서 정체불명의 물질이 유출되어 사람들이 좀비가 되기 시작한다. 서울에 좀비병이 창궐하기 직전에 부산행 KTX 열차가 출발하는데, 이 열차에 감염자 한명이 올라타고 열차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된다. 부산과 서울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을 제외한다면 이 설정에서 특별한 국가적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영화의 장점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이 무국적인 환경에서 재료들을 영리하게 조합하고 활용할 때다. 여기서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열차라는 공간과 좀비라는 소재를 결합했다는 것이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이 결합은 시작부터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한명씩 늘어나는 좀비들을 어떻게 격리시킬 것인가.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열차라는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정부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수많은 액션들을 만들어내고, <부산행>을 특별한 영화로 만드는 건 그 액션들이다. 결국 장르영화란 주어진 기성품 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활용 방법이 훌륭하다면 굳이 자체적인 독창성 따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여기서 독창성이란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은 잉여의 미덕이다. <부산행>은 가지고 있는 재료는 익숙하지만 그 재료의 결합이 종종 신선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는 장르영화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 신선함이 꼭 창작자의 개성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무국적적인 재료로 만든다고 해도 <부산행> 같은 영화를 완전히 무국적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반론만으로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결국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영화란 구체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한, 구체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부산행’이라는 제목을 단, 열차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자연스럽게 <부산행>의 좀비들은 ‘한국인 좀비’가 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먹어치운다. 이는 전혀 강요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원래 좀비란 메타포를 빨아들이는 스펀지와 같기 때문이다. 조지 로메로가 현대식 좀비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좀비는 늘 무언가에 대한 메타포였다. 작가나 감독이 이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다고 해도 관객은 좀비들을 무언가의 은유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부산행>에서 이 한국식 조건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달라붙는다. 방송에서 초창기에 좀비들을 과격 시위대라고 우기는 장면은 그 친숙한 몰아가기 패턴 때문에 특별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군복을 입은 좀비들은 등장하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의 특정 사건과 연결된다. 월드컵 응원을 끌어들이려면 약간의 노력과 장치가 필요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농담이다.

한국식 장르영화

문제는 영화가 창작자의 한국인, 정확히 말해 한국인 남성의 정체성에 말려들 때 일어난다.

여기서 한국식 장르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스릴러, 액션, 경찰물과 같은 장르를 한국식 영화로 만드는 재료와 태도는 무엇인가. 모든 한국영화에 통하는 답을 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럴싸한 일반화를 시도할 수는 있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이 한국 중·장년 남성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적 장르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영화를 아저씨화한다. 이 아저씨스러움은 <살인의 추억>(2003) 같은 걸작에서부터 <악의 연대기>(2015) 같은 태작의 영역 전체를 아우른다. 종종 이는 의도하지 않은 퀄리티를 만들어내는데, 한국인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 아저씨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하고 기형적이고 이상하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문제점은 아저씨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아저씨화가 별다른 통찰력 없이 이상할 정도로 얄팍하게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이 영화는 아저씨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그냥 아저씨의 작품처럼 보인다.

마동석의 캐릭터를 보자. 액션과 드라마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별문제가 없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는 우직한 남자다. 그런데 그가 중간에 멈추어 서서 마치 PPL이라도 하듯 아버지의 처지에 대해 한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엉겁결에 떠안은 징징거리는 신파에 감염되어버린다. 그건 딸에게 무관심한 일벌레/자본주의의 노예에서 점점 성장해가는 공유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클라이맥스에서 그는 끊임없이 관객의 공감과 연민을 유도하면서 캐릭터의 힘을 빼놓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빠지는 게 당연한 이 장면들이 살아남았다는 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질을 떠난 특별한 가치를 보았다는 것인데, 과연 그 가치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영화는 자신의 여성 캐릭터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김수안이 연기한 석우의 딸은 미래의 딸바보가 그려본 흠 없는 여자아이의 허수아비로, 실제 아이의 질감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정유미소희의 캐릭터들에게 제대로 된 액션과 드라마를 주는 방법도 모른다. 이들은 정유미 캐릭터가 창에 신문지를 바른 이후로 늘 구조되고 쫓기고 비명을 지를 뿐이다. 임신한 여성 캐릭터라면 그 주어진 한계 때문에 오히려 액션의 씨앗이 되어야 할 텐데, 그에 대해 생각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이 기회를 포기한 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시야 한계가 딱 그 정도라는 증거다. 그리고 지금 끊임없이 시야 확장을 시도하는 최근 장르영화의 경향을 고려해볼 때 이 안주는 기괴할 정도로 게을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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