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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야기꾼의 위기

시쳇말로 연식이 오래될수록 호기심도 감동의 물결도 줄어든다. 신체·정신적 노화와 연관이 있겠지만 경험의 축적도 무시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놀라 자빠질 일도 겪을수록 그러려니 하게 된다. 대단한 지혜로 여겨졌던 말씀이 하나마나한 설교가 되고, 용서할 수 없었던 악이 구제불능인 인간이란 종의 불가피한 특질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임박한 ‘멋진 신세계’는 사람들에게 방대한 간접경험을 손쉽게 제공함으로써 개인의 경험치를 극단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극장에 갈 때마다 점점 걱정이 앞선다. 기사와 별점과 평론을 주의 깊게 확인해도 자주 낭패를 본다. 영화는 분명 더 영리해졌는데 우리 또한 못지않게 영악해진 것이 문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과식했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내러티브를 기억하고 있다. 뒤죽박죽이기는 하지만 온갖 장르와 기승전결의 모델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가성비를 고려해 지불한 돈에 걸맞은 즐거움이 제공돼야 한다. 함부로 낯선 이야기로 어리둥절하게 하면 안 되며, 경쟁 사회에서 무용한 교훈이나 통찰을 주려는 속보이는 짓을 해서도 안 된다.

이제 이야기꾼들은 이야기 홍수 속에 살아온 관객에게 아첨하며 며칠 내에 수백만명을 유혹해야 살아남는 ‘왕좌의 게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두 시간 안에 참신하고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펼치는 미션은 너무 아슬아슬한 서커스가 아닌가. 공중그네에서 떨어질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보호용 그물이 아니라 파산과 경력의 종말이 아니던가.

이야기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작가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책에서 영감을 얻은 ‘길을 떠난 영웅’이라는 패턴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매뉴얼에 익숙할 것이다. 이 방법론은 관객을 유혹할 수 있는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준 동시에 이야기꾼들을 도그마에 가두었다. 관객의 주머니를 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지만 그토록 정형화된 패턴을 지켜야 한다면 과연 이야기란 인생을 바쳐 만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규범을 내면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창조적 일탈을 하면서도 천만 관객을 자신 있게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결국 영화라는 ‘왕좌의 게임’은 용 세 마리의 엄마쯤 되는 천재만이 생존할 수 있는 잔인한 놀이터였던가.

이런 도전이 새로운 것인지, 이야기의 역사에 늘 있던 딜레마의 변주일 뿐인지는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유례없이 이야기에 친숙하면서도 인색한 관객에 이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와 정교함으로 이야기를 생산할 인공지능이라는 존재다. 지난 세기에 전업 철학자나 시인이 되려는 낭만적인 기획이 생활인으로서는 얼마나 모험적이었지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기획은 실패도 많았지만 전 지구적 스타들도 탄생시켰다. 이 기획은 앞으로도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어떻게든 부르주아나 그 배우자 또는 그 자식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용의 알이라도 주워 부화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