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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무엇이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하는 효율적인 쪽으로 변했다고들 하더라 - <밀정> 김지운 감독 인터뷰

이상한 일이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은 설명하려 할수록 단어와 단어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마는 영화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의열단 단원들의 희생, 독립군을 척결하려는 일본 경찰들의 계략, 조선과 일본 중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수많은 밀정들의 암약과 방황. 이 모든 것들이 <밀정>을 수식하는 문장이 될 수 있으나 이들 중 어떤 것도 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뒤 잔상에 오랫동안 남는 건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지나간 1920년대 경성과 상하이의 어떤 풍경이다. 너무도 고요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을 주는 새벽녘 상하이의 뒷골목, 화려하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경성의 밤풍경, 그 사이를 배회하는 모던보이들의 고독한 얼굴. 그렇게 <밀정>은 표정과 무드의 누아르영화로 기억될 듯하다.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라스트 스탠드>(2013) 이후 3년 만에 한국 장편영화로 복귀한 김지운 감독을 <밀정>의 표지 촬영현장에서 만났다. 현장에서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직접 가져와 갈아 신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마 그런 디테일함이 <밀정>의 퍼즐 조각을 맞추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봤다.

-“<밀정>은 나의 첫 금연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탭들 말을 들어보니 촬영 첫날 첫신을 오케이한 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고. (웃음)

=금연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첫 촬영 기념으로 담배를 한대 피우겠다고 한 거였다. 1년 넘게 금연해왔으니까. 그래서 한대만 피우고 다시 끊으려 했는데 최재원 대표가 그 사진을 SNS에 올려놓고 “김지운 감독이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써놓은 거다. 아니, 이렇게 기정사실화되어버렸으니 한대만 더 피워보자 해서 결국…. (웃음) 그래도 1년간은 성공했으니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다. <밀정>에도 그런 대사가 있지 않나. ‘실패를 딛고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그 첫 촬영 장소가 상하이였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을 촬영했던 중국 둔황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다.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어떤 기운을 받았나.

=기운 얘기를 하니까 어쩐지 무속인이 된 것 같다. (웃음) 그런데 특정 장소에서 느끼는 기운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나는 공간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도 어떤 공간이 먼저 있고 그 공간과 인물이 조응해나가고 부딪히는 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만드는 편이다. 예를 들어 상하이 거리를 걸어갈 때 저 멀리서 전차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그로부터 받은 인상, 소리, 색감 등이 내 안에서 어떻게 정서화되고 그걸 어떤 서사 위에 얹혀놓을지를 고민하는 거다. 상하이는 100년이 넘는 오래된 도시인 동시에 글로벌한 느낌이 있는,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이 넘는 거대한 건물들, 서양화된 벽돌 건물, 돌길. 이 모든 것들이 상하이가 거쳐왔던 수많은 혼란의 역사를 담고 있으니 <밀정>의 시공간을 영화에 녹여내는 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줬을 거다. 상하이라는 도시를 걷다보면 마치 홀연하게 내가 그 시대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이곳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다른 묵직한 공기를 느꼈다.

-영화를 본 뒤 <밀정>의 핵심은 ‘무드’라는 생각을 했다. 스파이 장르와 시대에 정서를 덧입히는 방식이 근사하더라. <달콤한 인생>(2005)을 작업할 때에는 몰입을 위해 잘 재단된 슈트를 입고 다녔다고 들었다. 이 영화의 무드에 몰입하기 위해 도움이 됐던 것들은 무엇인가.

=영화의 톤 앤드 매너나 리듬감을 잡아갈 때 보통 사진과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밀정>은 역사적 격동 안에서 인간 내면의 미묘한 변화를 따라가야 하는 영화였기에, 단순히 스케일의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오는 순간들을, 다시 말해 묵직함과 섬세함을 어떻게 조율시킬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밀정>에 썼던 음악들은 대부분 그 시기의 음악들인데, 스윙재즈와 <볼레로>, <슬라브 무곡> 같은 곡들을 영화를 만들면서도 많이 들었다. 자주 듣던 음악이 내 안의 정서와 리듬감과 섞이며 무드가 생겨나는 거다. 혹은 어떤 공간을 찍은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고 그 색감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내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과정을 거치면 지나고 나서 그것들이 영화 안에서 재배치돼 있더라.

-더불어 <밀정>은 서사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의 흐름을 좇는다는 점에서 최근의 한국영화들과 궤를 달리하는 영화다. 이건 한편으로는 모험일 수도 있는 선택인데.

=언젠가 ‘내가 영화를 왜 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에는 잘 만든 작품임에도 지루할 때가 있는데, 왜 영화는 아닐까. 그건 사람이라는 우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온이 있고, 감정이 있고, 심장이 있는 존재들의 예기치 못한 표정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나는 짜릿함을 느낀다. 이 표정을 포착해내기 위해 나는 영화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누가 묘비명에 무슨 말을 넣고 싶냐고 묻기에 ‘사람의 얼굴을 가장 매혹적으로 담는 감독이 여기 묻히다’라고 썼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많지만 결국 영화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배우의 시선을 좇게 되고, 한숨을 좇게 되고, 침묵을 대신하는 표정을 좇게 된 것 같다.

-바스트숏, 클로즈업숏 등 타이트한 숏을 많이 쓴 이유도 그 때문인가.

=이 영화에서는 눈동자의 흔들림, 살며시 새어나오는 호흡이 중요하고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이 사람의 내면이고 이야기라는 생각이 있어서다. 넷중 한명이 밀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면서 은밀하게 내통하거나 간파를 해야 한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말들은 헛헛하게 흘러가고 그 말이 끝난 뒤에 옆사람을 응시하는 시선이 훨씬 더 중요하다. 때문에 일상적인 공간의 풍경일지라도 끊임없이 배우들에게 스몰 액팅을 주문했고 수면 밑으로 흐르는 팽팽한 느낌들이 장면마다 유지되는 게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의 얼굴에 관심이 많은 연출자로서 현장에서 따로 배우들 사진을 찍지는 않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지를 못하겠더라. (웃음) 풍경 사진은 많이 찍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배우랑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먼저 찍자는 말도 해본 적 없고. 아마 영화감독하면서 이렇게 배우랑 찍은 사진이 없는 감독도 드물 것 같다.

-수줍음이 많은 것 같다. (웃음)

=박찬욱 감독처럼 카메라에 조예가 깊고 잘 다룰 수 있다면 사실은 좀 찍고 싶은데, 나는 기계를 잘 안 쓰게 되더라. 사고 나서 보면 집에 비슷한 기계가 또 있고…. 그런 식이다. (웃음) 일단은 사람 얼굴에서 받는 어떤 인상이 중요한 거니까. 그걸 내 안에 넣어두면 기억회로에서 뭔가 다른 인상과 겹치면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만 하고 수집만 하는 것 같다.

-시선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정출(송강호)과 김우진(공유)이 사진관에서 처음 만나 서로의 본심을 감추고 대화하는 장면이 중요했을 거다.

=내가 송강호씨에게 가장 놀랐던 순간 중 하나가 바로 그 장면이다. 무슨 일을 하냐고 김우진이 묻자 이정출이 그를 스윽 쳐다보며 “경무국 경부 이정출이요”라고 하는데 자기 패를 꺼내 보이는 장면이라 더 긴장된 톤으로 말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순간 강호씨가 호흡을 툭, 내려놓고 대사를 치더라. 어떻게 저런 호흡으로 대사를 칠 수 있을까 싶어 정말 감탄했던 장면이다. 공유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사진관 장면에서 술 한잔하러 가자고 말한 다음 이정출을 보면서 씨익 웃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그 얼굴의 잔상이 굉장히 오래 남았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공유씨의 얼굴을 그 장면에서 봤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정출과 술을 마신 다음 헤어지고 나서 그를 스윽 쳐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굉장히 매서운 지점이 있더라. 이 친구에게 성격파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매서운 얼굴이 있다고 느꼈고, 언젠가 한번 악질 캐릭터로 이 배우를 써보면 대박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유도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하더라.

-배우 엄태구가 연기하는 조선인 일본 경찰 하시모토의 비중이 예상보다 컸다.

=하시모토 역할을 탐냈던 배우들이 정말 많았다. 오디션을 볼 때 다른 역할로 지원한 배우들조차 하시모토를 하고 싶다더라. 오늘 ‘기운’ 얘기를 많이 하는데(웃음) 태구가 왔을 때 이상한 에너지로 스파크가 팍 일어나는 걸 봤다. 저 배우의 내면에 엄청난 광기와 불덩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현장에서 태구가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에 자꾸 없어지는 거다. 한번은 내가 쫓아가봤다. 혼자 아무도 없는 촬영장 구석에서 대사를 하면서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어떤 혼자만의 제의가 있더라. 자기 몸을 막 털면서, 팍팍 치면서, 왜 자기 몸을 때리며 단련하는 수도승처럼 말이다. 아, 저 친구가 저런 과정을 거쳐 화면에 올라오는구나 싶었다. <대부2>(1974)를 찍을 때 코폴라 감독이 청년 시절의 로버트 드니로를 보며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던데, 태구를 보며 느꼈던 기운이 아마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친구’라는 표현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점이 재밌다. 히가시가 이정출에게 그러지 않나. “먼저 손 내밀어주는 이가 친구”라고.

=이 영화에서 ‘친구’라는 단어는 다양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김장욱과 이정출도 상하이 고려혁명단 당시에 친구였고, 히가시는 이정출에게 먼저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친구라며 변절의 합리화로서의 친구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정출과 김우진은 서서히 친구가 되어간다. 이처럼 친구라는 개념이 조금씩 다른 용도로, 다른 의미로, 다른 포석으로 쓰이는 걸 보여주고자 했다.

-김우진이 이정출을 깨워 새벽녘에 의열단 정채산(이병헌) 대장에게 데려가는 시퀀스는 기묘하고도 낯설게 느껴진다. 보통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 하는 사람이 잘 선택하지 않는 시간이 새벽이기도 하고.

=자다가 봉변을 당하는 느낌이랄까, 비관습적인 무엇이 등장인물에게 갑자기 팍 터졌을 때 잔뜩 긴장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정출의 입장에서는 심리적인 타격을 받는 거지. 그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놓고 그걸 풀어놓은 다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는, 말하자면 얼을 빼는 느낌을 위해 새벽녘의 비관습적, 비일상적인 시공간이 필요했다.

-폭탄을 실은 경성행 기차 안에서의 시퀀스는 이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 장면을 연출하며 어떤 점을 염두에 뒀나.

=이 기차는 단순히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운송 수단이라기보다 당시의 역사성, 시간성, 세월을 대변하는 존재로 나는 생각했다. 시대가 이정출과 김우진이라는 두 사람을 기차가 가는 방향처럼 자꾸만 어디로 밀고 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속에 타고 있는 인물들의 동선 또한 그들의 정체성과 내면, 목표의 동선과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우진을 보면 그는 기차 속에서 머뭇거림 없이 스트레이트하게 앞으로 간다. 그런데 이정출의 동선을 보면 갈팡질팡, 왔다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다.

-당신과 오래 협업한 스탭들은 <라스트 스탠드>로 할리우드에 다녀온 뒤 감독님이 좀 변한 것 같다고 하더라. 순간 판단을 훨씬 더 빠르고 유연하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던데.

=굉장히 효율적으로 변했다는 말을 나도 듣긴 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신속하게 대처하고 임기응변하는 건 예전에도 그래왔다. 짐작하자면, ‘예전에 비하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데 결과는 별로 안 좋더라’가 아니라 ‘예전과 비슷한 결과를 얻었는데 과정이 훨씬 효율적인 것 같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달라진 게 있다면 이런 거다. 한편으로 편해진 지점이기도 한데, 이제까지 영화를 만들 때 나는 ‘어떻게 만들지’를 많이 생각했다. 어떻게 찍을지를 생각하다보니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이상하게 비틀어보기도 한 거다. 지금도 그런 태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배우들과 스탭들에게도 이 장면에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먼저 한다. 무엇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그걸 짧은 시간 내에 집중해서 끄집어내는 거다. 만약 그렇게 해봤는데 안 되면 그때서야 ‘어떻게’의 순서가 오는 거지. 다른 말로 ‘뭣이 더 중한디’라고 할까. (좌중 웃음) 작품을 대하는 태도의 순서와 중요성이 <밀정>에서 내가 변한 지점이다.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보던 기간이 좀 짧아졌고, 감독의 지시가 더 명확해지니 스탭들의 힘도 더 정연하게 모아지는 부분들이 있다고 느꼈다.

-일각에서는 인물을 따라가는 흐름 뒤에서 서사의 세밀함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시선도 있다.

=아마도 서사가 아니라 인물쪽에 방점을 뒀기 때문에 이야기의 동력이 안 생긴다고 느낄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음악이나 장치를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관객이 등장인물의 마음의 변화를 느낄 법한 요소들은 충분히 포석을 깔아두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영화에 서사가 빈약하다고 생각하다면, 나는 그게 우리 영화의 흐름을 잘못 타고 들어간 거라고 생각한다.

-<밀정>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밀정>을 마치자마자 오래 묵혀뒀던 <인랑>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또 미스터리 호러 장르의 미국영화를 준비하고 있고, 프랑스 드라마의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4부작 프랑스 드라마인데, 아직 시나리오 단계라 얘기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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