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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법을 믿습니까?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에 착수함으로써 공은 법률가에게 넘어갔다. 주권자는 이토록 중요한 일을 저토록 미심쩍은 손에 넘기고 나니 자존심도 상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서리라는 생각이 순진하다는 것과 다른 경로는 없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어쩌겠는가.

법대에 들어간 1984년은 전두환씨가 청와대를 점거하고 있던 때였다. 지금은 29만원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 인물로 조롱받지만, 당시에는 시민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악의 화신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교수가 불가침의 인권과 법의 숭고한 이념을 가르칠 때, 학생들은 잡혀간 친구를 생각하며 교정에 주둔한 전경을 바라보았다. 법은 종편 패널의 장광설만큼이나 권위가 없었고, 법률가는 권력의 공범인 어릿광대였다. 그 시절에 공부해서 법률가가 되었다면, 회개는 못할망정 자랑할 일은 아니다. 세상의 고통에서 눈을 돌렸거나, 좋게 보아도 불의한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한 것은 분명하다. 나도 그렇다.

우여곡절 끝에 연수원에 들어가니 운동을 하다 방향을 선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동아리가 있었다. 300명의 연수생 중 20명이 안 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장기적 전망 아래 일단 변호사가 된 후 계속 투쟁하려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연수원을 졸업할 때 무척이나 놀랐다. 그중 몇명을 제외하고 모두 판검사를 지원했던 것이다. 졸업 후 처음으로 다시 모였을 때 일부가 묘한 선민의식마저 드러냈을 때에는 할 말이 없었다. 한때 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조차 이럴진대 그 시기에 별 고민 없이 법을 공부한 사람들을 적어도 정치적 사안에 관해서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사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런 법률가들의 손에 탄핵의 운명이 달려 있는 이 상황은 얼마나 고약한가.

법은 공동체의 약속이라는 명분으로 정당성을 얻었지만, 강자의 노리개라는 이유로 악명이 높다. 어느 날은 우리를 구하고, 어느 날은 우리를 버린다. 법이 목숨을 살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으로 살해된 사람이 있다. 필요할 때는 통화 중이고, 원치 않을 때는 벨이 울린다. 나는 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환상이기 때문에 ‘해결하는 것’보다는 ‘해결하는 것으로 보이는 게’ 중요하다. 심지어 ‘해결을 가로막는 것’이 실제 기능일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법에 대한 깊은 신뢰나 열렬한 혐오가 모두 거짓이라 생각한다. 오로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마침내 무너뜨렸을 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법은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것이 지금 시기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헌법재판소는 아마 탄핵을 가결할 것이다. 여기서 시민을 배반하면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냈다고 해서 칭송할 일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만일 이번에 배반당한다면, 난폭해진 역사의 이성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