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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영화계 내 성폭력 아홉 번째 대담: 예비영화인들 - 고지수·김신정·박예솜·정하림
윤혜지 사진 오계옥 2017-01-04

지난 1079호에서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영화계 내 성폭력 대담, 그 아홉 번째 모임에선 상업영화계 진출을 목표로 하는 예비영화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았다. 문예창작을 전공한 뒤 제14회 전북독립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단편 <관객과의 대화>(2013)를 연출하고 현재 <씨네21> 콘텐츠사업팀에 근무 중인 고지수, 영화과 전공자는 아니지만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한 박소담 주연의 단편 <수지>(2014)로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초이스를 수상한 김신정, 건국대학교 영화과에 재학 중이며 여러 상업·독립영화 촬영팀원으로 일한 바 있는 박예솜, 단편 <봉준호를 찾아서>(2015)를 연출해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됐고 현재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입학을 앞둔 정하림이 그들이다. 네 사람은 실제로 자신들이 막 영화계에 입문해 보고 겪고 들은 이야기들과 지난 여덟 차례의 현업 영화인들의 대담을 읽고 생각한 바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박예솜

예고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현재 건국대학교 영화과에 재학 중. <잉투기>(2013), <헬머니>(2015) 등 여러 상업·독립영화 촬영팀원으로 일한 바 있다. 지금은 김동영 촬영감독팀에 소속돼 있으며 <신의 한 수>(2014), <남과 여>(2015)의 촬영에 참여했다. “당한 만큼 때려눕히는 소녀, 죽지 않는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타칭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김신정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서 근무했다. 그 뒤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연출전공에 입학해 만든 단편 <수지>(2014)로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초이스를 수상했다. <수지>는 친부에게 성추행당한 끔찍한 기억을 물리적 복수로 이겨내는 여고생의 이야기다. ‘수지’를 박소담이 연기했다. 최근 연출한 단편 <겨울나무>(2016)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SIFF)의 2015년 ASIFF 펀드 프로젝트 피칭 선정작으로, 제14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공개됐다. 박근범 감독의 <남매>(2014)에서 조연출로, 하정우 감독의 <허삼관>(2014)과 김휘 감독의 <퇴마: 무녀굴>(2015)에선 연출부로 일했다.

정하림

현재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단편 <봉준호를 찾아서>(2015)를 연출해 제 41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됐다. <봉준호를 찾아서>는 ‘한국영화계의 기둥인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봉준호 감독의 흔적을 추적해나가는 세 고교생의 근성 넘치는 여정을 담은 영화다. 이 영화로 정하림은 독립영화계의 은근한 유명인사가 됐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입학을 앞두고 있다.

고지수

<씨네21> 콘텐츠사업팀에 재직 중이다. 문예창작 전공자. 평소 독립영화에 관심이 많던 대학생들이 영화감독과의 GV 뒤 실망스런 술자리를 가지게 된다는 내용의 단편 <관객과의 대화>(2013)를 연출해 제14회 전북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더이상 피해자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고발과 연대와 지지를 계속할 것이다. 변화된 현장에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미래의 장편을 꿈꾸고 있다.

-이 자리에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각자의 근황을 말해달라. 지난 여덟 차례의 현업 영화인들의 대담을 읽고 든 생각도 궁금하다.

=고지수_ 예비영화인들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해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 이 자리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지면으로 얼굴과 신분이 공개되는 건데, 언젠가 우리가 헤드크루들 아래서 일할 때 아예 불이익이 없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망설였지만 누군가는 말해야하고 누군가는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에 누군가 있으면 뒤에서도 누군가는 따라줘야 한다. 받쳐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혼자 서 있는 것뿐이다. 지금 여기에는 우리 네명뿐이지만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대담에 나간다고 하니 한 친구가 “너는 성폭력 당한 거 없잖아?”라고 물어와서 당황했다. 강간이나 성적 접촉만이 성폭력이 아니다. 무지함에서 비롯한 무신경한 언동도 성적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친구가 내게 한 질문이 지금껏 내가 해온 말과 행동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폭력적인 행동이라 여겨졌다. 문제를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무적으로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신정_ 대학생이 되자마자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었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내왔고 최근에 내가 찍은 단편 현장에서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일을 겪어 그 얘길 하려고 나왔다. 연출자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박예솜_ 최근 트위터에서 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올라오는 멘션을 다 지켜봤고, 문단 내 성폭력과 관련해선 나도 연관이 있어서 연대를 만들어 대항해보려 하고 있다. 별별 말을 다 들어봤고 어쨌든 이만큼 왔는데 더 머뭇거리기 싫어서 대담 제안에 응했다. 이미 주변에서 내 이미지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다. (웃음)

=정하림_ 난 고등학생이라 하고 싶은 영상 작업을 하면서 성폭력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지내왔는데 <씨네21>에 실린 대담 기사를 읽고 업계의 실상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조금 무섭지만 미리 듣고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나왔다. 지금은 수능이 끝나서 놀면서 지내고 있다.

박예솜_ 얼마 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에서 첫 진행한 성희롱 예방교육을 갔는데 참석자가 적어서 실망스러웠다. 이 해시태그가 등장한 게 지난 10월 말이고 지금은 연말이다. <씨네21> 기사로도 계속 다뤄지고 있다. 그런 분위기라 노조 활동가도 충분히 나왔으리라 생각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었다. 노무사가 촬영장 내 젠더 불평등 상황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헤드크루가 모범을 보여야지 어린 스탭들이 어떻게 한다고 뭐가 되겠나. 이 교육은 내가 받을 게 아니라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이나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CGK)이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지난 1085호 남성감독 대담 중 박찬욱 감독님이 투자사 내규를 만들어서 강제 진행해야 된다고 한 말이 인상 깊었다.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부족함을 느꼈다고 고백하신 것도 좋았다. 아직 희망이 있구나 싶더라.

김신정_ 나도 박찬욱 감독님이 대담에 나온 것 자체가 놀라웠다. 고민 하시는 게 많이 느껴졌다. 이 대담 릴레이는 처음부터 관심있게 지켜봤는데 사실 두어번 하다 말 줄 알았다. <씨네21>이 오래 지속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감명 깊었다.

정하림_ 나와 친구들의 관심사는 다들 대학 가는 것뿐이라 우리와는 먼 얘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앞으로 일할 곳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두려웠다. 대담에 나와준 분들 덕분에 잘 알게 돼서 고맙다. 하지만 학교에선 트위터에서 해시태그가 유행할 때만 잠깐 화제가 됐다가 지금은 관심이 많이 죽은 것 같다. 당장 대학이 연관돼서 그런지 요샌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추문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도 박찬욱 감독님처럼 대중적으로 유명한 분이 나오시면 찾아보곤 하니까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박예솜_ 그래서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감독의 발화가 중요하다. 여성들이 ‘내가 성폭력 피해자다’라고 하면 ‘누가 성폭력을 당했대’에 초점이 맞춰진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소수의 남성이 학과 전체를 장악하는 현실

-자신이 (예비)영화과 학생으로서 체감하고 있는 상황들은 어떤가. 학과 내 성비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궁금하고 소위 친목을 다지기 위한 그룹 활동, 가령 과내(교내) 단톡방, 술자리, 학과 MT 등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들이 있는지 알고 싶다.

정하림_ 우리반은 21명 정원 중 17명이 여자고, 4명이 남자다. 그중에서도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명이다. 작품을 할 때 항상 여자가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나는 성차별과는 무관하게 지낼 수 있었다. 대학 내 촬영현장은 뭐가 다른가.

박예솜_ 건대 영화과 통폐합 이전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성비는 여성이 훨씬 높다. 하지만 소수의 남성이 지배하는 학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10여년간 단 한번도 학생회장이 여성인 적이 없었다. 교수님이 싫어해서다. 한 남성 교수님은 일전에 “남학생만 교수 시켜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실제로 여성 전임교수는 한명도 없었다. 학내 촬영현장에서 우스갯소리로 ‘우린 건대가 아니라 건국여대’라 할 정도로 여학생이 수적으로 많은데 촬영장을 지배하는 건 감독도 프로듀서도 아니고 남학생 촬영감독이다. 촬영만큼은 꼭 남자 선배가 와서 하더라. 그래서 학교 작품 하면서 내가 촬영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다. 대학원에 가 있거나 어디 멀리 가 있는 남자 선배는 불러도 가까이 있는 나는 현장에 부르지 않는다. 학과 축제를 하면 교수님들도 한번씩 오시잖나. 그러면 누군가가 여자애들을 불러모아서 교수님 옆에 앉힌다. 그러면 교수님은 “너 저리 가고 연기전공 여자애 데려오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니 뭐가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하는 중에 교내 술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누군가가 “트위터에 올라가고 싶지 않으면 예솜이 앞에선 입조심하라”고 하더라. 그 말을 한 사람도 여자였다. 같은 여성으로서 이 사건을 이렇게밖에 보지 않고 있다는데 절망했다. 나는 그냥 “그래 너 입조심해야 되겠다”고만 답했다.

고지수_ 그러니까 나오는 말이 ‘명예자지’다. (웃음) 지난 1084호 여성 독립영화 감독 대담 중 마민지 감독님이 “계속 영화를 하려면 명예남성이 되든지, 썅X이 되든지, 사라지든지 답은 셋 중 하나”라고 했잖나. 사라지긴 싫은데. 남성들은 남자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생각조차 안 할 텐데 나는 이렇게까지 따지고 있는 게 딜레마다.

박예솜_ 얼마 전 단과대 내에서 성폭력 교육을 이수하라는 고지가 왔다. 학년별 단체 카톡방에서 ‘불참인원이 많은 학과는 불이익이 있으니 최대한 참석해달라’고 하더라. 왜 협박을 해야만 할까. 이미 학과도 통폐합된 마당에 더이상의 불이익도 없을 것 같은데 무슨 불이익이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답은 없었다. 언젠가 여성학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다. 여성의 피임과 낙태에 관해서만 가르치는 점이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시험문제는 여성 피임 주기법을 계산하란 거였다. 피임을 여자가 해야 한다는 논조다. 피임 문제를 이야기할 때 남성의 역할은 지워져 있다. 그 수업의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수업 끝난 뒤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가 남성 피임약 개발 기사를 찾아서 올렸는데 아무도 피드백을 하지 않았다. 교수님조차 남성 피임에 관해선 콘돔 사용만 가르치시고 여성 피임에 관해선 엄청나게 많은 걸 알려주셨다. “내가 이 수업을 수년간 진행했는데 그간 나에게 연락해서 낙태하는 병원 찾아달라는 여학생이 많더라”는 얘기도 하셨다. 왜 피임은 여학생만 교육받아야 하나. 대학에까지 와서 나는 왜 이런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하나. 대학원에 진학한 어떤 선배의 얘기로는, 강의에서 “수업 시간에 연출, 시나리오 작법 배우는 건 다 필요없다. 영화 잘 찍고 싶으면 연애 많이 하고 섹스 많이 하라”고 말한다더라. 누군가는 좋은 말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왜 수업 시간에 이런 얘길 들어야 하나 싶었다. 그런 말이 멋있는 걸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그런 수업은 안 듣고 싶은데 교수의 90%가 중년 남성이다. 여성 교수에게 배우고 싶어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의를 보이콧하면 들을 게 없다.

고지수_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했는데 유명한 모 시인이 교수였다. 과제가 ‘연애하기’였다. 연애나 성적인 경험을 예술가가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처럼 치부하는 것도 의식하고 가려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 교수님과의 술자리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교수님이, 한 여학생이 자기 손을 본인 가슴에 대고 만져보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당연히 “교수 미친 놈 아냐?”라는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데 그 여자가 누구인지 찾는 것에 초점에 맞춰져서 “그 여자 누구냐, 고지수 너 아니냐”라는 말까지 나와 황당했다. 교수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앞서 가십을 키우려고 하더라.

박예솜_ 많은 예비영화인들이 좌절하는 단계는 학교에서부터 시작되는 듯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쾌한 신체접촉, 언어폭력, 심지어 수업시간과 술자리에서조차 숱한 폭력을 겪는다. 결론은 ‘내가 영화인으로서 자격이 없나’ 하는 고민으로 귀결된다. 영화과 학생들의 능력치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데 단편 같이 찍자는 제의는 남성 학우들에게만 들어온다. 남학우들이 “나한테 들어온 촬영 일 몇개는 널 추천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 들으면…. (웃음) 한번은 여자인 내 친구가 장비 관리팀에서 전화를 받았다. “이런 문제가 생겼는데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거 보니 선배가 범인인 것 같다. 얼마를 지불해달라”는 거다. 친구가 “돌려쓰는 장비면 만진 사람 모두가 책임인 거 아니냐, 나는 감독이라 잘 모르니 프로듀서를 했던 예솜이한테 물어봐라”라고 답했더니 “예솜 선배는 무서워서 말 못하겠다”고 하더라. 나는 어느새 썅년의 이미지를 얻어서 모두가 날 피하게 됐다.

고지수_ 안 건드리고 피하자는 것 자체도 문제다. 그냥 배제하는 거잖나. 하림씨가 연출한 <봉준호를 찾아서>를 보니 하림씨를 포함한 여학생 두명, 남학생 한명이 나오더라. 보통 여자, 남자가 섞여 있으면 자연스럽게 남자를 감독으로 생각하던데 하림씨는 그런 경험은 없었나.

정하림_ 학생이라 팀원은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뤄져서 그런 문제를 겪은 적은 없다. 하지만 대학 영화과 면접을 준비하던 여자 친구가 “영화과는 남학생을 선호하기 때문에 여학생인 것 자체로 면접에서 불리해진다는 소문”으로 고민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난 어떤 걸 어필하면 좋을까? 저는 무거운 거 잘 듭니다. 남자 못지않게 튼튼합니다. 이래야 하냐”고 하더라. (웃음)

박예솜_ 극작과 진학을 준비하던 어떤 친구는 “연극에 무조건 남자가 있긴 해야 되니까 남자기만 하면 합격”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우리 학교는 건대 예문대 계정으로 성폭력 제보를 받은 적이 있다. 우리 과에서 “모 선배가 차 안에 둘만 있는 상황에서 ‘너 남친 사귀어봤니, 남친이랑 어디까지 해봤니, 섹스해봤니, 섹스 좋아하니’라고 물었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친구와 이 얘길 했는데 그 친구도 “그 선배가 나한테도 그런 적이 있다”고 하는 거다. 상습범이었다. 1학년 때는 다른 모 선배가 술자리에서 내 친구를 만져서 “왜 이러냐”고 하니까 “너 영화 안 하고 싶냐”고, 자기도 뭣도 아니면서 그런 적이 있다. 그 계정에 실명은 가리고 성과 소속만 적어서 올라왔는데 학생회에서 학과 단톡방에 그걸 캡처해 올리면서 “이런 무차별적인 폭로는 학과에 도움이 안 된다”고 제보자를 찾더라. 그래서 내가 “제보자는 찾아서 뭐 할 거냐. 남자 담당자와 단둘이 얘길 하는 게 제보자에겐 2차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드냐”고 했더니 “대응이 미흡한 점 사과드립니다. 담당을 여성으로 바꿨으니 제보자는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회신이 왔다. (웃음) 심지어 하루이틀 후엔 그 계정 자체가 폐쇄됐다. 소속과 학번, 성만 알면 가해자가 누군지 알 수 있으니까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할 수 있다는 거다.

촬영현장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조언들

-교내외에서 영화 연출을 하며 시나리오 개발부터 후반작업 과정까지 그 사이에서 느꼈던 젠더 차별의 경우들도 있나.

박예솜_ 영화는 무의식의 이미지를 계속 쌓아서 만들어내는 거다. 영화에서 보는 이미지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어떤 학습을 시킨다. 그래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웃음), 내가 이번에 연출할 영화에 여성주인공에겐 이름을 주고 남성 캐릭터는 이름을 안 줘봤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또 이건 긍정적인 사례인데, <남과 여>(2015) 촬영팀에 있었다. 개봉분엔 편집이 많이 됐지만 원래 정사 신이 훨씬 많았다. 그걸 준비하면서 김동영 촬영감독님이 “네가 본 한국영화 중에 정사 신이 기분 나쁘지 않았던 영화가 있으면 참고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떠오르는 영화가 없었다. “그러면 기분 나쁜 건 뭐였냐”고 물으셔서 그땐 답을 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좋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처음으로 정사 신을 ‘떡신’이라 말하는 걸 들어봤다.

김신정_ 내 영화 <수지>는 친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여고생(박소담)이 킥복싱을 배워서 친부에게 물리적인 복수를 한다는 내용인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비현실적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친부를 양부로 고치라고. 그런데 실제로 친부에 의한 성폭행이 굉장히 많이 발생하고 있잖나.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뭔가. 울고 자해하고 자살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그러지 않는 여자를 보고싶어서 이 영화를 만든 건데.

고지수_ 배우를 캐스팅할 때 모 역할에 모 배우를 캐스팅했더니 여성 스탭들은 배역이 잘 맞는다고 하던 걸 남자 스탭들 중 한둘은 꼭 “그런데 걘 못생겼잖아”라고 하더라. 한국영화계에 못생긴 남성배우가 얼마나 많나. (일동 웃음) 그들은 주인공도 하고 멜로도 하고 살인마도 하고 이것 저것 다 한다. 그런데 여성배우는 일단 예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다 못해 <미녀는 괴로워>(2006) 같은 영화도 그냥 뚱뚱한 배우를 캐스팅하면 안됐던 건가 싶다. 꼭 예쁜 여성배우에게 8시간씩 특수분장을 시킬 이유가 있었을까. 특수분장 기술을 실험한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스파이>(2015)에서 멜리사 매카시는 자기 개성으로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내놓았잖나.

김신정_ 모 남성 스탭이 제니퍼 로렌스 못생겼다 그랬을 때 어이가 없더라. (일동 웃음)

박예솜_ 우리 학과는 한 학기에 무조건 단편 한편씩을 찍는다. 너무 힘들어하니까 “촬영감독을 남친으로 사귀면 쉽다”고 하더라. “촬영장에서 연애 못하는 애들이 문제다, 연애를 못해서 네가 시나리오를 못 쓰는 거야”라는 말은 영화과 여학생들에겐 너무 흔한 얘기다. 촬영 도와달라고 하면 “여주인공 예쁘냐”는 질문이 첫 번째로 나온다. 언젠가는 장비대여점에서 내가 카메라를 만지고 있으니까 직원이 “쟤는 뭐냐”고 하길래 다른 사람에게 그 얘길 했더니 “네가 옷을 촬영팀같이 안 입으니까 그렇지”라는 답을 들었다. 어느 스탭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개는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 사람은 여자랑 일 안 하는데” 아니면 “그 사람은 여자 너무 좋아해”. 현장 정리를 할 때도 시비를 걸거나 훼방 놓는 사람을 내가 제지하면 나는 욕을 먹는데 남자 스탭을 시키면 그냥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화가 직업인 나는 없고 어딜 가나 그냥 여자가 된다. 내가 누구 촬영팀에서 몇 작품을 했고,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더라. <걷기왕>(2016) 현장의 성희롱 예방지침에 ‘함께 일하는 사람이 여성이든, 나이가 어리든, 경험이 적든 동등한 동료임을 인식해야 된다’고 쓰였던 게 인상 깊었다. 행인들은 내가 카메라 들고 지나가면 “남자들은 뭐하고 그걸 네가 드냐, 여자는 이런 일 하는 거 아니다”라고 말참견을 하고, 스트레스 받아서 택시 타고 퇴근하는 날엔 기사님이 “밤도 늦었는데 왜 돌아다니냐, 무슨 일 하냐, 그러다 너도 요즘 애들처럼 결혼 안 한다 하는 거 아니냐”고 하고. 휴차 때 누구 만나면 “너 왜 이렇게 ‘여자같이’ 입고 있냐”고 하고. 24시간이 여성 혐오로 풀충전돼 있다. (웃음)

고지수_ 모 영화를 할 때 산속에 가서 촬영한 적이 있다. 일주일 동안 가정집을 빌려서 촬영했는데 다 끝나고 보니까 스탭 중엔 여자가 나밖에 없더라. 그것도 다 끝나고 깨달았다. 나중에 다른 데서 당시 촬영 얘길 했더니 누군가 “너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너 혼자만 여자였다며 썸 안 탔어?”라고 하더라. 아무 일도 없는 게 당연한 거다. 일단 여성 스탭이 있으면 동료 이전에 이성적인 상대로 치부하는 시선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다.

박예솜_ 배우들을 품평하는 것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아역배우한테 “애가 색기가 있다”고 하고, “자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해야 여배우다운 거지”라는 말도 하고.

김신정_ 고작 나흘밖에 진행되지 않았던 내 단편 현장에서도 2건의 성폭력 사건이 있었다. 각각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었는데 나는 연출자 겸 제작자로서 그걸 나중에야 알았다. 알고 나서 뒤집어엎긴 했지만 너무 무기력해지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선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따지고 사과를 받아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때 내가 “기업으로 치면 이건 해고 사유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사람이 해고되는 게 아니잖나. 소문을 내봤자 “걔는 역시 여자를 참 좋아해” 이게 끝이고. 우리끼리라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몇달간 영화를 못하게 만드는 등 구체적인 처벌 지침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예솜_ 성폭력 전담기구가 있으면 단체는 대응하기 쉽잖나. 그러나 개인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역고소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조심스러워진다. 영화노조 성희롱 예방교육에도 나왔던 건데, 가해자가 헤드스탭일 경우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잖나. 감독이 가해자라고 감독을 엎을 순 없는 건데 어떡해야 되냐, 그냥 도돌이표였다. 영화노조 성희롱 예방교육 중 ‘찍는페미’에서 나오신 분이 한 얘긴데, 할리우드는 스페어 제도라고,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준비시키는 백업 멤버가 있다고 하더라.

김신정_ 진짜 답답하더라. 내 현장의 그 가해자도 현장 일을 오래 한 헤드스탭이었다. 4일짜리 단편에서도 그랬던 거면 지금까진 어땠겠나. 그러고도 마음껏 영화를 할 수 있는 판이구나 싶었다.

100억원짜리 말아먹는 여자감독도 보고 싶다

-각자 예비창작자로서 경계하고 주지하려는 것들이 있나.

고지수_ 윤리의식을 갖고 창작하는 거다. 시나리오 내용에서부터 스탭을 대하는 태도까지 모든 걸 고민하면서 일해야 한다. 언젠가 한번은 여자끼리만 작품을 해보자고 말한 적도 있다. 지난 1079호 대담에서 이영진 배우가 강진아 감독과 일하며 영화 얘기만 할 수 있던 게 좋았다고 말했잖나. 여자끼리 있으면 편하니까.

박예솜_ 책 제목도 있잖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펴냄). 여자 스탭이랑 일하면 맨스플레인은 안 겪어도 되니까 피곤하지 않다. <고스트버스터즈>(2016) 여성 스탭들이 함께 모여 각자 포지션과 이름이 적힌 걸 들고 사진 찍은 것도 좋아 보였다.

고지수_ 여자끼리 뭘 해보겠다고 하면 유난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남자들이 주축이 된 현장에서는 그게 유난이라고 아무도 말을 안 하잖나.

박예솜_ 동시에 남성들도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라 말하면 “너 그럼 메갈해?” 이런 반응이나 돌아온다. “너는 똑같이 일하고 돈을 덜 받는 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거잖나. 뭐가 다른가.

김신정_ 최근 모 단편을 보고 GV를 듣는데 누군가가 손들고 감독에게 “당신 페미니스트냐”고 묻더라. 감독은 극구 손사래를 치면서 “절대 아니”라고 했다.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페미니스트인 게 뭐가 어떤가.

박예솜_ 이 대담에 참석한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그간 해시태그 운동 하는 것도 지켜봐왔다고, 멋있다고, 좋은 일 한다고 하더라. 멋있으면 같이 하면 되잖나. 지금 최고의 유행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 가장 힙한 거다. 난 내가 지질하게 SNS에서나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웃음) 유난스러운 애로 찍힌 김에 진짜 개유난이 뭔지 보여줄까도 생각하고 있다. (웃음) 적어도 난 내 영화에서만큼은 몸을 파는 10대나 강간당하는 10대를 등장시키고 싶지 않다. 당하면 그만큼 때려눕히는 소녀, 죽지 않는 소녀를 만나고 싶다. 연애엔 관심 없는 무성애자 90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킬 수도 있을 거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지 몰라도, 혼자서라도 난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로 남고 싶다. 세상에 100억원, 200억원짜리 영화 말아먹는 남자감독은 많은데 그런 여자감독은 왜 없나. 100억원짜리 말아먹는 여자감독도 보고 싶다. (일동 웃음)

정하림_ 듣자니 나는 스스로를 미리부터 규정지은 것 같다. 고1 때부터 어차피 나는 현장에 나가서도 스크립터나 조연출밖에 못할 거라 생각 하고 기술직은 아예 손도 안 댔다. 촬영도 해봐야 재미를 알 텐데 ‘커서도 이걸 할 테니’라고 생각하면서 난 3년 내내 조연출, 미술, 스크립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083호 여성학자·활동가 대담에서 조혜영 프로그래머가 여성들이 미리부터 자기 포지션을 정해두고 있다고 하신 말씀이 놀라웠다. 생각해보니 아무도 나에게 너 촬영하지 마, 조명하지 마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졸업작품에선 조명부에 지원했다. 스스로 닫아둔 걸 오픈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박예솜_ 젊은 세대한테 작은 성공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잖나. 나도 누군가가 나에게 “너도 촬영할 수 있어, 카메라 무거우면 너가 디자인만 하고 오퍼레이터는 다른 사람시키면 된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이런 것도 작은 성공 경험이라 생각한다. 하림씨처럼 “나도 해볼까”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고지수_ 그런 의미에서 윤여정 선생님 같은 원로 여성배우들의 말도 들어보고 싶다. 이상아 배우가 어려서 임권택 감독님 현장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던 게 이제 와서 사회적 이슈가 되는 시대잖나. 당시엔 고립되고 소통할 수 없던 환경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분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다.

박예솜_ 나는 또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SNS 환경에 익숙한 우리 또래는 더 극단적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따르거나 배척하고 있는 것 같다. 남자나 여자나 우리 또래는 다들 빛나는 커리어도 아직 없고, 놓인 환경이나 받아온 교육도 고만고만할 텐데 그런 비슷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 역시도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다고 생각 하는데 남성들은 안 그럴 것 같다. 영화과 1학년이 되면 여학생은 무조건 스크립터, 남학생은 무조건 붐 오퍼를 한다. 스크립터 하고 싶은 남자애들, 붐 오퍼 하고 싶은 여자애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요즘엔 나랑 반대로, 여초인 분장, 의상팀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도 나처럼 젠더 불평등, 위계에 의한 젠더 폭력을 겪은 사람들일까 궁금하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폭력적인 환경을 그들도 어린 남성으로서 똑같이 겪었는지 궁금하다.

정하림_ 맞다. 지금까지의 대담이 대부분 여성들의 얘기였는데 다른 위치에 놓인 남성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다.

김신정_ 가능하다면 남성 촬영감독이나 헤드스탭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박예솜_ 할리우드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자기 경험담을 말하는 릴레이가 있었다. 어떤 여성 촬영감독님이 만삭일 때 핸드헬드 카메라 들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부른 배를 가리키며) 나에겐 이미 좋은 카메라 지지대가 있었다”고 농담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더 나아질 10년 뒤를 만들어간다

-각자 앞으로의 계획들이 어떻게 되나.

김신정_ 액션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원래 액션영화에 관심이 많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를 보고 반성했다. (웃음)

고지수_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로 단편을 하나 더 만들어볼 생각이다. 공교롭게도 지금 모인 스탭이 거의 여자거나 젠더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들이다. 부지런 떨어서 얼른 작품을 완성하고 싶다. 또 한 가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고발과 연대와 지지를 계속할 것이다. 변화된 현장에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정하림_ 영화를 찍어서 10대의 마지막을 멋있게 보내고 싶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자고만 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행복하다. (일동 웃음) 마침 아는 분이 촬영·조명 스탭으로 불러준 현장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일해볼까 한다.

박예솜_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문단 내 성폭력과 관련한 연대활동을 내년까지 무사히 하고 싶다. 아직 졸업까지 일년이 더 남아서 졸업작품도 준비해야 한다. 남의 돈으로 찍기 위해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웃음) 학교에서의 마지막 일년은 젠더 평등한 건대를 만드는 데 힘쓰고자 소모임을 계획 중이다. 건대를 상징하는 동물이 소인데, 암소가 행복한 건대를 만들자는 의미에서 모임 이름은 ‘암소해피’(I’m so happy)다. (일동 웃음) 동국대는 교수들과 연계한 인권지킴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고학년이 돼야 영화를 찍을 수 있으니까 적은 수의 현장에 일일이 인권지킴이를 파견할 수 있다고 들었다. 촬영장마다 인권지킴이가 젠더 불평등의 경우를 강력히 제재한다고 했다. 일종의 권력을 주고 그걸 사용하게 하니까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 우리는 1학년 때부터 단편을 찍어야 해서 한 학기에 현장만 40개라 그 제도를 도입하긴 어려울 것 같아 아쉽다.

정하림_ 영화과 진학을 앞두고 있어서 기대가 컸는데 오늘 다 부서졌다. (일동 웃음)

박예솜_ 중앙대는 오래된 곳이라 분위기가 더 유하다고 들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다. 그리고 하림씨가 중앙대를 바꿀 테니까. (일동 웃음)

김신정_ 예솜씨는 건대를 바꾸고. (일동 웃음) 내가 여성운동에 한창 심취했을 때랑 비교하면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금보다 10년 후는 훨씬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