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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정의 영화비평] <랜드 오브 마인>과 전쟁의 감각

육체적 접촉이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이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맥락은 아마 연인과의 관계에서일 것이다. 이때 육체적 접촉이란 물리적 자극과 그에 따라 환기되는 정서까지 지시한다. 정서를 환기하지 않는 단순한 충돌을 가리켜 ‘육체적 접촉’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영화와의 그것은 가능할까. 시각과 청각으로 전달되는 영화의 특성상 촉각적 자극은 존재하지 않고, 4D영화의 자극이란 영화의 맥락에 어울리는 자극의 흉내일 뿐 영화 자체의 물질성은 아니다. 영화가 육체적 감각을 최대한 생생하게 재현하여 관객이 촉각적 감각의 전이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그 자극이 환기하는 정서는 대개 관객이 과거에 느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이지, 그 영화만의 고유한 것을 새롭게 전달받은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촉각적 감각’을 거쳐 ‘그 대상만의 고유한 정서’를 환기하게 되는, 영화와의 육체적 접촉이란 가능한 일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랜드 오브 마인>(2015)에 등장하는 이상한 어긋남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어떤 폭력적 장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덴마크 군인인 칼 라스무센(로랜드 몰러)은 패전 후 퇴각하는 독일군 중 한명의 얼굴을 주먹으로 수차례 친다. 둔탁한 타격음이 날 때마다 독일군의 얼굴은 피범벅이 된다. 그리고 포로로 남은 독일 소년병들이 등장한다. 지뢰 해체를 교육하는 에베 옌슨(미켈 폴스라르)은 소년들이 서투른 행동을 보일 때마다 그들의 손을 내리친다. 여기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신체적 통증은 물리적 충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고통이며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감각과 동시에 발생한다.

그런데 이 소년병들이 실제 지뢰를 대면하면서 영화는 이상하게 틀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소년병에게 지뢰 해체를 교육할 때, 그들이 실수를 보일 때마다 “너는 방금 손을 잃었어”, “너는 방금 죽었어”라고 한 교관의 말을 기억한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어린 소년들이 다치는 경우는 지뢰를 해체하다가 실수하는 순간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첫 폭발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지뢰 해체가 서툴러서 고생하는 사람은 하프케(오스카 뵈켈만)지만, 그가 성공한 후 웃음을 보이자 다른 지뢰가 폭발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지뢰 위에서 떠는 하프케의 손을 그토록 오래 보여준 이유는 무엇일까. 두 번째 폭발에서 상사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에른스트(에밀 벨톤)지만 곧이어 다른 소년이 사고를 당한다. 세바스티안(루이스 호프만)의 손이 조심스럽게 모래를 더듬어 지뢰를 해체하고 나면 웨너(오스카 벨톤)의 지뢰가 폭발하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간신히 지뢰 제거에 성공했는데 에른스트가 지뢰를 밟고 죽음을 맞는다.

대개 영화가 하나의 대상에 주목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면 그 대상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지뢰를 더듬는 소년의 손을 오래 보여주고서 그 손을 떠난 의외의 장소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감각과 폭발 사이의 영화적 인과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지뢰가 해체되어 안심하면 잠시의 시간차를 두고서 엉뚱한 지뢰가 폭발한다. 지뢰에 대한 감각과 폭발의 발생. 이것들은 서로 맞닿아 있지 못하고 불길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의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지뢰를 잘못 다루었다는 명백한 사건의 결과로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일단 지뢰를 감각하면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체하더라도 잠시 후 어디선가 폭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모래에 누워 작업하는 소년들 뒤로 줄지어 늘어선 지뢰들은 매우 불길한 느낌을 뿜어낸다. 소년들이 이미 그렇게 많은 지뢰를 감각하였다는 사실이 대규모의 폭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거대한 폭발이 발생한다. 누군가가 지뢰를 만지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감각과 폭발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 이 균열은 영화 초반의 명확한 통증 장면들(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지뢰를 잘못 다루자 손을 내리치던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앞선 장면들에서 육체에 대한 물리적 타격과 그로 인한 고통은 맞닿아 있다. 그러나 뒤의 장면들에서 소년의 육체가 지뢰를 감각하는 순간과 폭발로 인한 고 통은 계속해서 어긋난다. 이런 어긋남이 영화에 존재하는 이유는 해변의 의미를 반추하면 알 수 있다. 지뢰가 폭발하기 전 소년들은 음식을 훔쳐 먹고, 미래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죽음의 해변에서 폭발은 인간적인 욕망을 품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소녀를 구하자 에른스트가 자살을 택하듯, 이 해변은 소년들에게 어떠한 인간적 긍정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아도 징벌처럼 폭발은 발생하는 것이다.

감각과 폭발의 어긋남이 환기하는 불안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균열의 이유가 아니라 그것의 영화적 성취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는 유독 촉각적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소년들의 몸은 라스무센 상사와 비교되어 더욱 여리게 보인다. 이들이 해변에 누워 고운 모래 안으로 막대를 찌르면, 스르륵 들어가던 막대 끝에 탁 하고 무언가가 걸린다. 곧이어 소년들의 무방비한 맨손이 모래를 헤치고 검은 고철 덩어리와 만난다. 희고 따듯한 손과 검고 차가운 지뢰의 만남은 그 대조만으로도 감각적이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들은 관객이 영화의 감각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감각 하나는 막대가 지뢰에 접촉하는 순간의 그것이다. 이 감각은 여러 소년의 손을 통하여 영화 내내 반복된다. 고운 입자들 사이로 탁 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 그 단순한 느낌은 곧이어 일어날 폭발을 예고한다. 지뢰와의 접촉은 폭발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폭발이 언제, 누구를 노리는지는 알 수 없다. 관객은 그저 다음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쫓아간다. 그렇게 영화가 펼친 감각과 폭발의 틈 사이로 불안의 정서가 들어찬다. 이 정서는 <랜드 오브 마인> 속 해변의 풍경과 어린 소년들의 흔들리는 눈으로 직조된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감각, 폭발이 반복될수록 불안은 더욱 선명해진다. 지뢰를 만나러 가는 소년의 무방비한 여린 손이 우리의 신경을 일깨우고, 잔뜩 예민해진 신경 사이로 막대가 지뢰에 닿는 둔탁한 감각 하나가 들어오며, 감각과 폭발의 틈 사이로 불안이 가득히 스며들어 이 둔탁한 막대의 감각과 만난다. 이렇게 하나의 감각이 하나의 정서와 결합한다.

많은 전쟁영화들이 전쟁의 아픔을 전달하는 방식은 주로 감각이나 감정의 전이를 통한 것이다. 그런데 <랜드 오브 마인>은 좀 이상한 길을 간다. 영화는 무언가를 설명하기보다 어떤 감각 하나를 가져와 자꾸만 우리 손에 갖다댄다. 아마도 이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감각이나 감정의 전이 대신, 관객이 언젠가 한번쯤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감각과 만나겠노라고 결심한 것 같다. 부드러운 것들 사이로 차가운 고철 하나가 탁 하고 걸리는 그 감각. 영화를 보고 나오면 어느새 그 감각 뒤로 불안의 정서가 진득하게 들러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나는 현실 속에서 비슷한 감각을 느끼는 순간에 이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현실의 물질이 나에게 전하는 육체적 감각, 그 감각이 환기하는 영화만의 고유한 정서. <랜드 오브 마인>과 접촉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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