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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쟁점 : 테크노 페미니즘-여성, 과학 그리고 SF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에이다 러블레이스>

영화가 막 탄생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여성 영화인들은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그들은 제작과 출연뿐만 아니라 기술적 혁신에서도 과감한 성취를 이끌어냈다. 예를 들어, 1896년 <양배추 요정>이라는 세계 최초의 서사영화를 만들었던 프랑스 감독 알리스 기 블라셰는 무성영화에 사운드를 삽입하는 크로노폰 시스템을 개발·사용했으며, 흑백필름에 부분적으로 컬러를 입히는 컬러 틴팅과 이중인화 등의 특수효과를 거의 최초로 구현했다. 그러나 장편 길이가 일반화되고 무성에서 유성으로 전환되면서 영화산업은 전격적으로 여성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더 큰 자본과 최신 기술이 투입되는 순간 여성들이 그 기술을 통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현재 영화산업에서도 이런 현실은 거의 나아진 바 없다. 촬영을 비롯한 기술팀의 현저히 낮은 여성 비율을 보라.

사실 영화뿐만 아니라 여타의 하이테크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비디오게임처럼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분야에서 여성의 진입은 남성들의 심각한 저항에 부딪힌다. 기술집약적 분야는 개발과 사용 모두 남성의 것이라는 편견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팽배하다. 그러한 편견은 남성 게이머들이 여성 게임 개발자와 비평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북미의 ‘게이머 게이트’ 스캔들과 페미니즘과 관련된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성 게이머들의 공격을 받고 참여한 게임에서 해고당한 김자연 성우 사건을 야기하고 있다. 19세기 말과 21세기의 두 사건은 하이테크 문화산업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같은 과학기술에서의 여성의 부당한 배제와 남성 중심성을 깨기 위해 ‘테크노 페미니즘-여성, 과학 그리고 SF’라는 제목하에 특별전을 준비했다. ‘SF와 페미니즘’은 영화비평에서 자주 다뤘던 주제지만 남성 과학자의 피조물인 ‘여성 로봇’과 ‘SF 액션 여전사’를 주로 다뤄온 경향이 있다. 이번 특별전은 이 관점을 바꿔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영화에서 여성 과학자와 우주비행사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그리고 페미니즘 관점에서 과학기술과 SF를 어떻게 스토리텔링할지에 초점을 맞췄다. 시선을 피조물에서 과학자로 돌린 배경에는 당연히 최근 여성 과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히든 피겨스> <컨택트> <인터스텔라> 같은 상업영화들의 주목할 만한 부상이 있다. 주인공 과학자가 여성이 되면 성별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설계자와 창조자로서의 여성 과학자는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며, 파괴적이든 대안적이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여성의 관점에서 세계관을 구성한다. 즉 여성 과학자가 주인공인 서사에서 여성은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 소위 ‘민폐 캐릭터’가 아니라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시간을 여행하는 인물이 된다. 여성 과학자 주인공은 ‘구원자로서의 액션 여전사’와 ‘구원을 기다리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새로운 페미니스트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갖는다.

<노 그래비티>

이번 특별전 영화 중 10대 소녀들의 앱 개발 대회 ‘테크노베이션 챌린지’를 다룬 다큐멘터리 <코드 걸>(2015)은 10대 소녀들이 그러한 서사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현실에서 수행하는지를 보여준다. A형 간염 예방을 위한 깨끗한 우물 지도 앱, 10대 안전운전을 위한 앱 등 몰도바, 나이지리아, 브라질, 미국 등 전세계 소녀들은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앱을 개발하고, 사업 모델과 프로모션까지 기획해 발표를 준비한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경쟁의 탈락을 실패가 아니라 여성 과학기술자 네트워크를 갖는 경로로 이해한다.

<테크노페미니즘: 여성 과학 기술과 새롭게 만나다>의 저자 주디 와이즈먼은 이제 여성들이 과학 기술의 접근을 넘어서 네트워크 형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공간적으로도 필요하지만 시간적으로도 필요하다. 초기 여성 영화인들처럼 여성 과학기술자들은 뚜렷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퀴리 ‘부인’처럼 누구의 아내와 딸, 혹은 조수로 기억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 중 틸다 스윈튼이 주연을 맡은 <에이다 러블레이스>(1997)를 비롯해 <마리 퀴리-지식의 용기>(2016)와 <노 그래비티>(2011)는 과학자를 꿈꾸는 소녀들의 외로움을 경감시켜줄 역사 속 선배들을 다룬다.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 린 허시먼 리슨의 <에이다 러블레이스>는 2004년의 에이미라는 천재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DNA 정보를 메모리화한 증강현실 프로그램을 개발해 실존했던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블레이스를 담은, 전기와 SF 판타지가 혼합된 영화다. 두 여성 과학자는 100년 이상의 시간차에도 관습적 여성 역할을 강요하는 어머니, 과학기술적 성취를 방해하고 가로채는 남성들, 임신과 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등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 1997년에 제작된 이 사이버 판타지는 이제는 빈티지가 되어버린 사이버 공간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노 그래비티>는 실제 우주공학자이기도 한 감독 실비아 카살리노의 개인적 이야기와 3세대에 걸친 전세계 여성 우주인을 다룬다. 이 작품은 최초의 우주인은 남성도, 인간도 아닌 개와 원숭이였다는 사실, 1963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였던 발렌티나 테레쉬코바를 소련이 프리츠 랑의 <우먼 인 더 문>(1929)과 유사하게 우상화하며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한 사례, 1992년 최초의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가 되었던 메이 제미슨이 TV시리즈 <스타트렉>의 흑인 여성 통신장교 우후라를 보며 우주비행사를 꿈꿨고 이후 1987년 시작된 시리즈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에 트랜스퍼 오퍼레이터 역할로 출연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 그대로 판타지가 현실로, 현실이 판타지가 된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 지구 생존 가이드>

과학과 스토리텔링, 현실과 판타지, 이성과 감정, 정신과 몸,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이성애 규범 등의 이분법 해체는 ‘테크노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주장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종과 종을 넘어선 트랜스-종(trans-species)을 제안하고 <사이보그 선언문: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쓴 도나 해러웨이다. 이 특별전의 <도나 해러웨이: 지구 생존 가이드>(2016)는 난해할 수도 있는 그녀의 사상을 유희적이고 친근하게 풀어준다. 이 영화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인터뷰를 하는 해러웨이의 배경에 유영하는 신비로운 거대 문어와 해파리, 외계인 이미지들은 SF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다.

이 특별전은 국내 여성 영화인들이 SF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제공한다는 목적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를 위해 여성들이 재생산 노예로 전락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폴커 슐렌도르프의 고전 SF <시녀 이야기>(1990) 상영을 비롯해 국내 SF 작가들이 참여하는 포럼, 여성게이머 모임 전국디바협회와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이 함께하는 스페셜 토크(<방해말고 꺼져!: 게임과 여성> 상영 후),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비극적 사건을 VR영화로 만든 김진아 감독의 <동두천>(2017) 상영과 제작과정을 나누는 토크가 준비되어 있다. 이 영화들 및 이벤트와 함께 ‘여신이 아닌 사이보그’가 되는 체험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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