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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①] 영화 제작부터 비평까지, 왜 페미니즘이 필요한가
임수연 2017-09-11

여성 혐오를 빼면 한국영화에 무엇이 남을까

<브이아이피> 네이버 평점란에 달린 댓글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모 축구게임 사이트에 올라온 글. 페미니즘 미디어 비평을 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보이콧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왜 까이고 있냐.” 갑자기 동생에게 날아온 연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딱히 최근에 잘못한 일도 없는(것 같은)데 왜지. 빠른 속도로 지난 인생을 복습하며 동생이 넘겨준 주소를 클릭했다. ‘믿고 걸러도 되는 영화평론가’라는 제목으로 모 축구 게임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물이 떴다(아이고, 어쩌다 강제로 평론가 데뷔). 내가 <원더우먼>(“전쟁=남성성과 싸우는 원더우먼, 멋지다”), <청년경찰>(“여성 관객의 욕망을 너무 쉽게 본다”), <브이아이피>(“저렇게까지 여성에게 폭력적이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에 남긴 20자평이 수상해(?) 필자의 과거를 추적해보니 대중문화 속 여성 혐오를 다루는 책에 저자로 참여하고 김자연 성우, 웹툰 작가, 정의당, <시사IN> 등에 ‘메갈리아’ 낙인을 찍으며 불매운동이 벌어졌던 사례를 정리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뉘앙스였지만, 그냥 내가 페미니스트이며 여성 혐오 문제에 관심이 있어 관련 기사를 쓴 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 사이트에서 5만번을 훌쩍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인기글’이 된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모 야구 커뮤니티, 모 격투기 커뮤니티, 모 축구 커뮤니티 등으로 같은 내용의 글이 옮겨졌다. 최초 제보자였던 동생 외에도 몇몇 지인들이 글을 보고 깜짝 놀라 연락을 줬다.

1차적으로 든 감정은 공포였다. “공개고문해야 한다”, “꼴페미(꼴통+페미니스트의 준말로, 페미니스트를 낮추어 일컫는 말)는 보이는 대로 다 패죽여야 한다”, “여성 평론가들은 동물보다 더 저능한 생물체인 꼴페미 비율이 엄청 많다”, “페미가 만들어낸 현대의 괴물”, “벌레 같아요. (중략) 여생충이라 부르고 싶네요” 등등. 모두 날 특정해 쏟아진 말이다. 왜 다른 기자와 달리 얼굴 사진이 안 올라와 있느냐는 댓글을 봤을 땐 소름이 돋았다. 원색적인 비난을 거르고 침착하게 다시 반응을 살펴보았다. “영화 평가의 중심이 작품이 아니라 여자”라는 것이 나를 향한 적대심의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룸>.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스크린에서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에 주목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포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담아내고 그 조각들이 연결되는 방식을 해석해서 각자의 이론적 토대와 시각에 따라 전달하는 것이 바로 ‘영화평’이라 생각한다. 1975년 <스크린>에 실린 로라 멀비의 전설적인 에세이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1975)가 카메라의 시선이 남성의 그것이며 영화에서 여성을 볼거리로 소비하고 있음을 지적한 이래 여성학은 영화를 보는 아주 중요한 틀을 제시해왔다. 여성은 영화역사에서 어떤 피사체보다도 욕망의 대상으로, 주변부로 치우쳐서 그려진 존재가 아니던가.

다만 <악마를 보았다>(2010), <신세계>(2012) 당시에는 젠더 문제가 제기되지 않다가 최근 들어 불편해들 한다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 그 숫자가 전보다 많아진 것처럼 보이는 게 심기를 건드린 듯하다. 2004년 <씨네21>은 이미 김기덕의 영화를 둘러싼 강성률, 심영섭 평론가의 ‘페미니즘 비평’ 설전을 여러 호에 걸쳐 실은 적이 있다. <신세계> 당시에도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일부 관객에게서 나왔다. 지금처럼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청년경찰> <브이아이피> 등에 제기된 비판을 이슈화하는 데 일조했다. 예전에는 영화지에 실리는 비평이나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발견된 젠더 감수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요즘엔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네이버 네티즌 평점에 1점 테러를 하게 만들 만큼 여론을 빠르게 형성시킨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분위기에 크게 반발한다. 주된 근거는 ‘표현의 자유 억압’이나 ‘자기 검열’이다. 한 영화 커뮤니티는 이들 작품이 여성 혐오적이라는 비판과 반박이 길게 이어지며 게시판이 시끄러워지자 아예 ‘남혐’, ‘여혐’ 언급을 전면 금지하는 공지를 내걸었다.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의도가 ‘남혐, 여혐’의 결론으로만 도달하고 끝없는 싸움의 원인만 제공”하며 “창작자로 하여금 작품을 만들 때 자기 검열부터 거치라고 강요하는 상황”이기에 “검열과 눈치로 태어난 문화가 제대로 만들어질 리 없다”는 것이 논리였다. 한편 일부 비판자들은 영화를 분석하는 방식이 페미니즘에 치우쳐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1990년대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비판이다. ‘기승전페미니즘’식 비평은 필자가 영화를 해석하는 시야가 좁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으로만 영화를 보려고 한다”는 식의 비판은 당장 십수년 전 <씨네21> 페미니즘 비평 기사 댓글에도 등장할 만큼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비평가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식견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왜 나쁜가를 먼저 논증해야지 페미니즘 영화비평 자체가 잘못됐다고 매도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여성학적으로‘만’ 작품을 뜯어보는 영화기자나 평론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또한 누군가가 철학이나 종교학 지식을 토대로 영화를 읽는 시도를 자주 한다는 이유로 원색적인 비난이 집단적으로 쏟아지는 모습 또한 목격한 적이 없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영화분석이 넘칠 만큼 많이 존재한 역사는 단언컨대 없었다. 단적으로 한국에서도 1990년대부터 꾸준히 지적돼온 영화 속 젠더 문제를 두고 마치 이런 일이 처음 벌어진 것처럼 반응하는 지금의 상황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 브라이언 드 팔마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 캐릭터를 멍청한 존재로밖에 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로 영화를 보는 재미

페미니즘 영화비평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여성영화가 제작되는 빈도가 올라갔는지, 비슷한 논의만 제기되는 페미니즘 비평이 과연 어디까지 생명력을 가질지 의문이라며 “페미니즘 비평은 죽었다”는 입장도 있다. 쇼히니 초두리는 <페미니즘 영화이론>에서 여전히 페미니즘 영화이론이 가진 비평적 잠재력과 확장 가능성을 말한다. 로라 멀비, 카자 실버먼, 테레사 드 로레티스, 바버라 크리드 등 기존의 페미니즘 영화이론이 할리우드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것이 제3세계 영화로 확장되고 VOD로 영화를 보는 새로운 경험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페미니즘 영화이론학계에서는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 비백인 여성 및 LGBT 등 사회적 정체성과 그와 관련한 억압과 차별 등을 다룬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비평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냥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본다고 고백하는 관객에게도 페미니즘은 도움이 된다. 혹자는 페미니즘 같은 것을 신경 쓰며 보다가 영화의 재미를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장착하고 영화를 본 후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에 몰랐던 새로운 재미를 만났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여성인데 저렇게까지 한다는 식의 시선이 아닌, 그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이 자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인간으로서 묘사되는 것이 짜릿했다. 박찬욱의 <아가씨>(2016)는 명료하게 만들어진 페미니즘영화가 독특한 문화를 가진 팬덤까지 양상해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대의 변화를 수용한 최근작이 아닌, 지나간 작품을 감상할 때의 감흥도 퇴색되지 않는다. 수동적인 여성상, 여성의 도구화 같은 개념에 집착하면 여성에 대한 관음증적인 시선이 가득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수많은 탁월한 작품을 어떻게 즐길 것이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갇힌 할리우드의 수많은 연애영화는 그저 불편하기만 할 것이라는 ‘걱정’은 섣부르다. 영화감상이란 행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드 팔마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여성 혐오에 대한 의혹이나 “사실 그의 영화에서는 대체로 남성이 더 고통받는다”는 반박이 어디까지 타당한지 능동적으로 고민하게 도와줬다. 또한 가부장적 시각과 여성 혐오적인 태도가 지금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클래식을 본다는 것은, 영화사에서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결과 어떻게 영화가 진화하거나 퇴보했는지 자연스레 살펴보는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누구도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영화를 만들지 말라고 강제적으로 금지하거나 검열을 시도한 적은 없지만, 아마 소비자들이 여성 혐오적인 영화에 보이콧을 하는 상황이 창작자를 위축하게 만들어 사실상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일 테다. 그리고 이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막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묘사는 수십년 전에 이미 비슷하게 존재했고 당시에도 비판을 받았다. 영화에서 성녀 혹은 창녀로 그려지는 여성의 이미지를 분석한 <숭배에서 강간까지>가 출간된 것이 40년도 더 전인 1974년이다. 여성의 고통을 단순히 전시한다거나 여성을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 소모시킨다거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반복하는 것이 그저 게으르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수십년에 걸쳐 약자인 여성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굳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범죄자의 악마성을 충분히 재현해내거나 더 나아가 새로운 시각에서 여성을 다룬 작품들은 오히려 그 독창성을 인정받곤 한다.

<숭배에서 강간까지>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2015)은 얼마든지 자극적인 묘사의 늪에 빠지기 쉬웠던 납치, 강간 등의 소재를 ‘룸’ 안과 밖이 보여주는 상징을 통해 묵직하게 풀어낸다. 전세계적으로 12억달러의 수익을 올린 디즈니의 <겨울왕국>(2013)처럼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평단을 만족시키고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즉각적으로 페미니즘이 영화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의식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은 예술의 방해꾼이 아닌 오히려 윤리적이면서 세련되기까지 한 연출을 하게끔 작용하는 자극제에 가까웠다. 이런 고무적인 분위기에 부합하듯 2016년 한국영화계에서는 어느 때보다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내세운 영화가 많이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아가씨>를 시작으로 <우리들> <비밀은 없다> <범죄의 여왕> <죽여주는 여자> 그리고 <미씽: 사라진 여자>까지 다채로운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인 올해의 한국영화는 젠더 감수성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새로운 시각이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과거를 답습했다는 점에서도 퇴보다. 진짜 다양성이나 문화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반문하고 싶다. 그러니 페미니즘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극한다는 면에서라도 창작자가 기꺼이 흡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만드는 사람에게는 더 빼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자극하고, 영화 애호가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알게 해주는 페미니즘이 ‘믿고 걸러야 한다’며 매도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아가씨>

‘여성 혐오’가 뭐기에

서양의 미소지니(misogyny) 개념이 한국에 들어올 때 ‘여성 혐오’로 번역된 까닭일까, 무언가가 여성 혐오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여성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반박이 돌아올 때가 여전히 많다. 여성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고 고발하고, 혹은 섹시한 여성의 매력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왜 여성 혐오적인 것이냐는 것이다. 미소지니는 여성을 멸시하거나 어떠한 편견을 갖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 여성의 타자화 일체를 일컫는 개념이다. 가령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거나 연약해서 지켜줘야 한다는 식의 표현은 당연히 여성 혐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호방한 성격을 가진 여성은 여성성을 갖지 못한 존재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로 신격화하는 언행도 마찬가지다. 같은 맥락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남자들의 오래된 고민도 해결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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