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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고전 걸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 케네스 브래너 연출로 다시 태어나다
장영엽 2017-11-27

낭만과 기품을 잃지 않고 현대의 관객을 만나다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속에는 두명의 명탐정이 있다(상대적으로 활약이 적었던 부부 탐정, 토미/터펜스와 할리 퀸은 잠시 잊도록 하자). 영국 근교의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을 거의 떠나지 않음에도 누구보다 명석하게 인간 본성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과 “영국에서 가장 멋진 콧수염을 가진” 세계적인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가 그들이다. 미스 마플이 크리스티의 유년 시절을 행복하게 해준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들”(가장 직접적인 롤모델은 크리스티의 외할머니 마거릿 밀러다)로부터 영향받아 만들어진 인물이라면, 에르퀼 포와로는 낯선 장소와 우연한 만남을 사랑했던 모험가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를 닮은 캐릭터다.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과 <나일강의 죽음>(1937) 등 이국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한 포와로의 여정은 실제로 두 번째 남편이자 고고학자였던 맥스 맬로원의 탐사 여정에 종종 동반했던 크리스티의 삶과 맞닿아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1934년 출간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에르퀼 포와로를 주인공으로 삼아 모험과 설렘, 음모와 죽음,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유려하게 풀어낸 걸작 미스터리 소설이다. 크리스티는 1932년 미국 공군 장교 찰스 린더버그의 아들이 납치 살해당한 실제 사건과 1928년 가을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크리스티에게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발칸반도와 유고슬라비아, 이스탄불과 다마스쿠스를 경유하는 이 열차는 1930년대 당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메트로폴리스적인 공간으로, 크리스티에게 강렬한 문화적 자극을 주었다. 더불어 그녀가 열차에 오르게 된 건 첫 번째 남편 아치볼드 크리스티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낸 뒤의 일이다. 열차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사랑, 맥스 맬로원을 만나고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으니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기폭제와 같은 작품이었을 거다.

낭만적인 모험과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캐릭터, 놀라운 반전을 갖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영화 제작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원작 출간으로부터 80여년이 된 지금까지 영화화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자세한 내용은 50쪽 참조). 우선 애거사 크리스티 자신이 그녀의 소설이 영화화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영화가 그녀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재해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보다 에르퀼 포와로의 코믹한 모습을 부각한 영화 <ABC 살인 사건>(1965)의 경우 크리스티가 시나리오를 거절해 영화 제작이 지연됐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의 제작을 맡은 마크 고든사이먼 킨버그 역시 애거사 크리스티의 모든 작품을 관리하는 애거사 크리스티 리미티드로부터 영화의 판권을 얻기 위해 5년 동안 공을 들여야 했다. “작품의 본질은 바꾸지 않고 현대의 관객에게 사실적으로 스릴 넘치는 작품을 선사하겠다”는 합의하에 영화화가 가능해졌고, <로건>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시나리오를 쓴 마이클 그린과 영국의 저명한 배우이자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합류하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제작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주요 내용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케네스 브래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오른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험악한 인상의 남자 라쳇(조니 뎁)이 포와로를 찾아온다. 그는 살해 위협을 받고 있으니 자신의 보디가드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지만 포와로는 단칼에 거절한다. 그날 밤, 디나르 알프스(과거 유고슬로비아)를 통과하던 열차는 눈사태로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라쳇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포와로는 열차에 함께 탑승한 열두명의 인물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그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한다. 게르하르트 하드만 교수(윌럼 더포)와 집사 에드워드 마스터맨(데릭 제이코비), 드라고미로프 공작부인(주디 덴치)과 하녀 힐드가르트 슈미트(올리비아 콜먼), 가정교사 메리 데번햄(데이지 리들리)과 의사 아버스넛(레슬리 오덤 주니어), 선교사 필라 에스트라바도스(페넬로페 크루즈)와 허바드 부인(미셸 파이퍼), 사업가 마르케스(마누엘 가르시아 룰포)와 안드레니 백작 부부(세르게이 폴루닌, 루시 보인턴), 라쳇의 비서 핵터 맥퀸(조시 게드)이 그들이다.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가 원작을 비롯해 다양한 버전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포와로의 강박증적인 면모를 부각한다는 점이다. 포와로가 등장한 첫 소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1920)에서 포와로의 친구 아서 헤이스팅스는 결벽에 가까운 그의 깔끔함에 놀라며 “총상보다 작은 먼지가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영화 속 포와로의 모습이 딱 그렇다. 케네스 브래너가 분한 에르퀼 포와로는 깔끔할 뿐만 아니라 강박적으로 균형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아침 식사로 나온 삶은 달걀 두개의 높이가 맞지 않다거나 주변 사람들이 넥타이를 비뚤게 맨 모습을 참지 못하는 포와로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그가 사건 해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포와로에 있어 살인 사건은 “정의의 저울”이 기울어졌음을 의미하며, 그의 소명은 기울어진 저울을 다시 평행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추리의 무대가 기차 안에서 눈밭까지 확장된다는 점도 원작과 다르다. 포와로가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탑승하는 계기를 제공한 열차 책임자 부크를 맡은 배우 톰 베이트먼은 케네스 브래너가 “각 캐릭터와의 면담이 저마다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길 원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용의선상에 오른 열두명의 인물은 기차 안과 밖, 그리고 열차가 멈춘 디나르 알프스의 고가교(원작에서는 산기슭으로 묘사된다)를 오가며 포와로의 심문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포와로는 고가교를 가로지르며 용의자를 추격하고 지팡이를 사용한 액션 신을 선보이기도 한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용의자들을 포와로가 심문하는 과정은 다소 심심하게 묘사되었다. 원작에서 용의자의 국적에 따라 언어를 바꾸고, 그들의 배경에 따라 심문 방식을 바꾸는 포와로의 모습은, 그리고 용의자들의 대응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중요한 묘미였지만 이 영화에선 사건의 조각을 맞추는 과정으로 기능할 뿐이다(시드니 루멧의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원작의 이러한 묘미를 훌륭하게 살려낸 영화다). 대신 케네스 브래너는 범인의 정체가 공개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온전히 배우들의 것으로 만든다. “누가 뭐라 해도 옳고 그름은 명확하죠. 그 중간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던 포와로의 이성을 흔들리게 하는 강렬한 감정이 주디 덴치, 윌럼 더포, 페넬로페 크루즈, 데이지 리들리, 올리비아 콜먼 등 명배우들의 얼굴에 스쳐지나간다. 특히 허버드 부인을 연기하는 미셸 파이퍼의 모습은 1974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속 로렌 바콜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기품 있고 처연하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열차가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만하다(스포일러가 아니다). 대상을 더 명확하게, 더 광활하게 조명하는 65mm 필름으로 촬영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짧은 시간을 공유하고 다른 미래를 향해 떠나는 수많은 삶을 스테디캠으로 좇는다. 떠나왔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에둘러 말하는 듯한 이 장면은 기차영화의 고전적인 매력을 체감하게 한다. 21세기 오락영화의 매력과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함을 갖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꽤 만족스러운 크리스티의 유산이다. 그리고 포와로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11월20일 이십세기폭스사는 이 영화의 속편인 <나일강의 죽음>의 제작 계획을 밝혔다. 모험과 미스터리는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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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