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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 <신과 함께-죄와 벌> <1987>이 기댄 한국적 신파라는 환상
송경원 2018-01-30

눈물의 얄팍함에 대하여

<신과 함께-죄와 벌>

끝내 울린다.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을 보며 약간 분했다. 머리 한구석으로 영화의 헐거운 만듦새를 평하면서도 결국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마주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모종의 분리가 일어났다. 지금 이 눈물은 층층이 쌓아올린 서사적 카타르시스에 기인한 게 아니라 말초적인 반응에 가깝다. 그렇게 자조하며 눈물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신과 함께>가 뿌리는 눈물은 확실히 자극적이다. 앞뒤 맥락 생략하고 딱 그 장면, 아들들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던 어머니의 희생과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둘째 아들 수홍의 오열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2시간을 다 볼 필요도 없다. 수홍 역의 김동욱, 어머니 역의 예수정 배우의 얼굴만으로도 만들어지는 눈물이다.

신파와 정신 승리 사이

<신과 함께>가 굳이 비평의 언어를 필요로 하진 않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고 각 시퀀스는 기계적으로 결합돼 있다. 소위 말하는 흥행 공식이란 불분명한 믿음에 기인해 다듬어진 공업적 결과물을 앞에 두고 분석과 해석의 칼날은 쓸모를 잃는다.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능이기에 극장에서 즐기고 나오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감정이 요동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 눈물이 현실의 이면을 파헤치거나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종류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하진 않는다. 즉각적으로 뽑혀 나와 쉽게 휘발되는 속성의 눈물이란 것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눈물에 나름대로 화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아마도 그것이 최근 언론에서 ‘한국적 신파’라는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원인이 아닐까 싶다.

내겐 영화보다 차라리 이 한국적 신파라는 용어의 쓰임새가 재미있게 다가왔다. 그게 지금 뒤늦게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신과 함께>는 빈말로도 잘 정돈된 서사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확히는 영화라기보다 스크린이라는 테마파크의 놀이장치에 가깝기에 이래저래 단점을 지적하기 훨씬 쉬운 영화다. 그럼에도 끝내 보는 이들이 눈물 흘리는 이유 혹은 흥행한 이유를 어떤 식으로든 설명, 아니 나처럼 변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호소하는 감성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한국적 신파’란 표현은 그렇게 구분되는 영화들만큼이나 기능적이다. 그건 겨울 시장을 겨냥한 세편의 한국영화 <강철비> <신과 함께> <1987> 이외에도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염력>까지 최근 한국영화들이 취하는 어떤 습관처럼 보인다. 영화학자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일찌감치 “한 국가의 영화들은 그 나라의 정신성을 반영한다”고 통찰했다. 특정 공동체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건 영화의 기본 속성 중 하나다. 평론가 짐 호버먼 역시 9·11 테러 이후의 미국영화가 그 충격을 피해갈 수 없음을 고백한 바 있다. 세월호나 용산참사를 겪은 이후의 한국영화가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 한마디로 영화는 지금 우리가 숨쉬는 현실을 반영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 반영의 과정을 한 꺼풀 벗겨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지금이라는 시점, 이 자리라는 공간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체험이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건 공동체의 체험, 다시 말해 관객의 위치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영화를 미국인으로서 본다는 것과 한국 관객이 볼 때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엄연히 다르다. 단순하게는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고 좀더 결을 헤집어보자면 분리 불가능한 내적 시선과 거리를 둔 타자의 시선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때 영화의 형태는 영화 자체, 그러니까 텍스트의 내부 요소뿐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관객의 위치에 의해 지정된다.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된 소위 내셔널 시네마는 이야기의 화자와 청자 사이에 성립되는 일종의 대화다. 중요한 건 그게 꼭 자국 사람들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9·11 사태 이후 미국영화는 미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미국인이 체험하는 감각과 타자인 우리가 체험하는 관점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한편의 영화가 제 몸속에 녹여낸 시대성이다.

나는 모든 영화가 현재적이라고 생각한다. 재현이 시작되는 순간 그 어떤 소재, 시간, 공간을 다룬다 하더라고 영화는 결국 ‘지금, 여기, 우리’의 화법으로 치환된다. SF영화가 말하는 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상상의 공간을 빌린 지금 우리의 사연이다. 과거를 재현한 역사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그날의 사건을 단순 복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 역사와 기억을 지금 어떤 형태로 소환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강철비> <신과 함께> <1987> 이 세편의 영화가 각기 다른 소재를 소비하는 방식에는 지금 한국 사회의 오랜 습관이 묻어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 앞에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이고 싶다면 그 뒤에 오는 건 신파나 눈물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이 징후를 정신 승리라고 부르고 싶다. 위장된 만족, 회피와 변명, 행간의 외면 등 비슷한 맥락에서 뭐라고 불러도 좋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보여주지 않아도 좋을 것을 전시하고 보여줘야 할 것을 생략한다. 그 끝에 도달하는 건 전설의 서사, 승리의 기억, 달콤한 환상이다. 어쩌면 그건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방식과도 닮았다.

<1987>

세 가지 엔딩, 세 가지 환상

일련의 한국영화에서 내가 가장 당황스러운 건 엔딩이다. 상업영화가 해피엔딩으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를 위해 관객은 값을 지불하고 2시간 동안의 안락한 즐거움을 제공받는다. 이건 이미 합의된 게임이자 소비행위다. 문제는 그게 아닌 척 위장할 때 벌어진다. <신과 함께>는 그런 의미에서 비교적 다행스럽다. 이 영화는 엔딩마저 기능적이다. 반대로 말해 뜬금없다. 자홍(차태현)의 죄가 용서되고 48번째 귀인으로 인정받은 뒤 저승 삼 차사는 갑자기 천륜지옥 한가운데로 소환된다. 그리고 염라대왕의 군사들과 한바탕 전투를 시작한다. 이 장면의 기능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후속편 <신과 함께-인과 연>으로 이어지는 장치, 다른 하나는 앞서 보여주지 못했던 CG액션과 스펙터클의 전시다. 인과의 필연에 따른 장면이 아니라 서사적으로 불필요한 상황을 영화의 마침표로 정했다는 건 <신과 함께>가 목적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건 재미난 환상이다. <신과 함께>가 한국의 현실을 세밀하게 반영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가 보편타당하고 1차원적인 윤리의 메시지 안에 모든 맥락을 환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이른바 통속이다. 다만 이 통속성은 한국 사회의 고유한 맥락이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서든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굳이 예를 들자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지향하는 ‘당연함’의 관점에 가깝다. 다행히 <신과 함께>는 이러한 통속을 위장하진 않는다. 대신 영화가 은폐하는 것이 있다면 현실은 영화처럼 단순하지도 착하지도 않다는 점 정도인데, 여기에 통속적인 모성 드라마를 설득의 도구로 배치해 지금 우리의 이야기인 척하는 게 이 영화가 행하고 있는 최소한의 정신 승리다. 지옥에서나마 정의(또는 상식)가 구현되는 환상. 다만 그것을 판타지-환상의 자리에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나는 이 엔딩의 조악함을 비웃으면서도 긍정한다.

반면 <강철비>나 <1987>은 문제가 다르다. 세 영화의 엔딩에서 공통점을 찾자면 셋 다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엔딩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환상을 제시한다. 가령 남북한이 핵을 나눠 가지는 <강철비>의 엔딩은 애초에 하나였던 민족이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자강의 꿈을 이뤄준다. 이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한민족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달콤한 환상이다. 영화니까, 가정법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는 인물의 평범함, 소시민적 면모를 부각하는 <강철비>의 캐릭터 설득 방식과 괴리된다. 정우성과 곽도원이 연기하는 두 철우는 각각 특수요원과 외교안보수석이라는 범상치 않은 지위에서 활약하지만 주류에서 밀려나 오직 자신만을 믿고 버텨야 하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다. 이는 곧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로 치환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상징적이다. 그런데 두명의 철우가 관객과 눈을 맞추는 지점은 이들의 위치와 판단이 아니라 모두 가족의 부양을 어깨에 짊어진 아버지의 면모에 있다. 언제 어떤 상황에 대입해도 기능을 발휘하는 이른바 통속의 서사다. 두 철우가 설득력을 얻는 건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아니라 나와 다르지 않은 소시민의 면모인 것이다. 여기에 자식들과 소통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진심, 그러니까 ‘아재스러움’을 토핑처럼 끼얹어 변명의 고리로 제공한다. 두 철우의 드라마를 전개하던 영화가 마지막 순간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핵과 북한 지도자의 교환이라는 상황으로 점프하는 엔딩은 억지로 기워 붙인 사족 같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바로 그 한번의 사족을 제시하기 위해 그간의 군사적, 상황적 리얼리티를 반복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관되다. <강철비>의 엔딩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마음 한편에서 바라 마지않던 판타지다. 이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통속의 서사를 빌려오는 비겁함은 우리가 진정 바라봐야 할 복잡다단한 현실의 얽힌 매듭을 은폐한다. 도발적인 만큼 달콤하고 통속의 우회로를 거친만큼 위험하다. 이에 비하면 북한 지도자와 북한의 핵을 교환한다는 발상의 안일함 자체는 사소한 문제다.

<1987>은 또 다른 관점에서 환상을 제공한다. 우선 이 이야기의 엔딩이 6월 민주항쟁의 시위 현장에서 멈춘다는 건 그날의 함성을 승리로 기억하고 싶은 환상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6월 민주항쟁이 미완으로 끝났음을 이미 알고 있다. 시민들의 결집된 힘이 대통령직선제를 이끌어냈지만 그 과실은 다시 노태우로 대변되는 군사정권에 돌아갔다. 시민들은 분열을 경험했고 이날의 경험으로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골이 한층 깊게 파였다. 이야기를 여기서 멈춘 의도는 이해된다. 그날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늘날 광장의 혁명을 일궈냈음을 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패의 체험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성취가 이뤄졌다고 항변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과 촛불혁명 사이에 반드시 인과관계가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를 인과 또는 닮은꼴로 그리고자 하는 건 차라리 당위나 욕망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만들어진 전설에 기대어 많은 부분을 놓쳐왔다. 전설은 희망을 안기기도 하지만 진실을 가리도록 현혹하기도 한다. <1987>은 방식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영웅 서사에 가깝다. 다만 여기서 영웅의 이름은 민중이고,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당위의 근거로 삼는다. 게다가 연희(김태리)가 각성하고 의식화되는 과정은 드라마적으로는 통속에 기대고 있다. 동료에게 보호받지 못했던 연희의 아버지, 개인의 상처는 어쩌면 대의에 가려진 민중의 속살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처들이 무수히 나고 그 위에 새살이 돋는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그 개별의 상처가 터지고 아무는 과정이다. 한데 <1987>은 이를 대의라는 거대한 시대 속으로 각자의 상처를 매몰시킨다. 필요에 따른 선택이겠지만 명백히 의도를 가진 외면 내지 은폐다.

연희가 개인사에 얽힌 상처를 딛고 다시금 대의의 물결로 투신하도록 종용하는 장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다. 그리고 <1987>은 여기서 최악의 선택을 한다. 이한열 열사와 박종철 열사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을 세세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울분과 분노를 자극하는 강력한 통속이다. 이 거대한 비극 앞에 세세한 모순과 작은 상처 따윈 금세 가려지고 연희도 거리의 대열에 합류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세상에 작은 상처 같은 건 없다. 타인의 상처보다 내 손톱 밑 생채기가 더 아픈 게 인지상정이다. 필요에 따라 그 우열을 정하는 순간 영화는 자의적인 생략이라는 왜곡을 자행한다. 우리는 그날 진정 승리했는가. <1987>은 민중의 승리라는 당위에 머무르기 위해 역사를 정지시킨다. 이건 역사라기보다 차라리 지금 이 시점, 그러니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겪고 다시금 촛불을 체험한 우리의 바람이 투영된 신화다.

<강철비>

통속이라는 신화가 지워버린 것

“누구도 정치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1971년에 <워싱턴 포스트>에서 폭로한 미국 국방부의 기밀문서를 다룬 영화 <더 포스트>를 만든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재현하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영화 모두 현재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링컨> <스파이 브릿지>에서 스필버그가 정치를 다루는 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더 포스트>는 단순히 역사를 기술하는 영화는 아닐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더 포스트>는 “오늘의 미국을 만든 사건이자 올해의 미국이 만든” 영화다. 이 명제는 사실 모든 영화에 적용된다고 본다. 일례로 게리 올드먼이 처칠로 분해 화제가 된 조 라이트 감독의 <다키스트 아워>는 케르크전투와 다이나모 철수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하지만 <다키스트 아워>는 영국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 바치는 영화이자 어쩌면 앞으로 어두워질지도 모를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을 향해 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영화다. 장면의 조밀함이나 조 라이트 감독의 과시적 미장센과 별개로 이 영화에서 처칠이 각성하는 이후의 시퀀스는 마치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2014)을 보는 것 같다. 지하철을 탈 줄 모르는 상류층 처칠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시민들을 만나 그 목소리를 듣고 새삼 각성하는 장면은 민중으로 대변되는 목소리의 스펙터클에 호소한다. 이들은 전쟁의 참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열정적으로 항전의 열의를 다진다. 익스트림 부감으로 찍힌 전장의 풍경과 지하철 시민들의 얼굴의 대비는 극적인 효과는 확실하되 다른 한편으론 끔찍하다. 그럼에도 <다키스트 아워>가 힘을 발휘한다면 지금 이 시점에 아마도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을 영국인들이 바라는 목소리와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실화에 근거했는지와 별개로 이것 역시 일종의 판타지의 엔딩이라 할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1987>의 엔딩 시퀀스를 보며 즉각 떠오른 영화가 있다. 톰 후퍼 감독의 <레미제라블>(2012)이다. 교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발장의 모습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대망의 엔딩은 실로 격동적이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목청 높여 소리치는 민중, 나부끼는 깃발의 풍경을 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장발장의 죽음을 기점으로 영화는 환상으로 돌입한다. 죽음을 맞이한 장발장의 영혼이 의자에 앉은 자신을 바라보고 뒤이어 자신을 맞이하러 온 판틴을 뒤로한 채 신부가 있는 촛불의 방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민중의 노래’ 합창이 오버랩되며 바리케이드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를 지켜보는 장발장, 판틴 그리고 모든 죽은 인물이 함께하는 대단원의 엔딩. 이 장면은 죽음에 직면한 장발장의 상상인가, 모두가 꿈꿨던 세상의 풍경일까. 아니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시적 묘사일까. 이 환상적인 장면은 아마도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도 바라 마지않던 순간의 재현이다. 이게 진짜인지 환상인지, 앞선 서사적 개연성과 인과관계가 들어맞는지는 큰 의미 없다. 일련의 몽타주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걸 노골적으로 재현, 전시해 프랑스 대혁명에 얽힌 장대한 이야기를 현재형의 격동으로 치환한다. 같은 맥락에서 <1987>의 엔딩 역시 어쩌면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비전을 재현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강철비> <신과 함께> <1987>의 엔딩은 어떻게든 관객을 만족시키려 애쓴다. 그래서 불만족스러웠다. 이 영화들은 판타지, 현실 모사, 역사 재현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에 접근함에도 종착지는 일관되게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는 환상의 영역에 머문다. 일종의 신화를 세우려 몰두한다고 볼 수도 있다. 반면 그 방식은 매우 통속적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모성의 신화, 민족의 신화, 민중의 신화는 정작 이 땅에 그 흙발을 디디진 않고 아름답고 근사한 것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과 봐야 할 것을 보여주지 않는 건 사이에는 백만광년쯤의 거리가 있다. 혹은 머리와 가슴 사이의 거리. 현재 한국영화들은 통속의 드라마가 주는 리얼리티를 핑계 삼아 리얼-실재를 지우는 중이다. 현실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탈출구 없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얄팍한 걸 알면서도 마음을 달랠 신화에 매달린다. 한국 사회가 유독 가상화폐에 민감하게 휘둘리는 것도 어쩐지 이해가 간다. 그 절박한 몸부림이야말로 어쩌면 지금 한국영화가 노골적으로 낭비 중인 한국적 신파란 방만한 용어의 속살과 닮았다.

솔직히 세편의 영화 모두 재미있게 봤다. 그래서 더 격렬하게 발버둥쳐봤다. 피곤한 일이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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