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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②] <딸에 대하여> 김혜진 작가,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이 나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다혜 사진 오계옥 2018-02-26

“한번씩 딸애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고 나면 한동안은 이렇게 그 생각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벌을 받는 걸까. 뭔가 잘못된 것을 딸애에게 물려주고 만 걸까.” <딸에 대하여>에서 동성 연인과 사는 딸을 보는 ‘나’의 마음은 원망보다 자책감을 닮았다.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과 달리 어머니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이야기는, 무조건 이해하고 끌어안으려는 애정과 세상 기준에 뭐하나 모자람 없기를 바라는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의 마음을 따른다. 이 소설을 쓴 김혜진은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치킨 런>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13년 <중앙역>으로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 도시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그 도시의 시작이자 끝이며, 집을 잃은 많은 이들에게는 종착역인 중앙역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중앙역>을 떠올리면, 생활과 생업의 장면들을 담아낸 소설집 <어비>와 모녀와 그녀들과 관계된 다른 두 여성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조금씩 김혜진 자신의 삶을 닮은 형태로 이야기가 변화를 겪은 결과물이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이후 여성 독자들에게 가장 주목받은 소설 중 한편인 <딸에 대하여>를 쓴 김혜진을 만났다.

-<딸에 대하여>는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을 받은 <중앙역> 이후 만 3년 만에 발표한 장편이다. 어떻게 지냈나.

=특별한 일은 없었다. 2016년에 발표한 단편집 <어비>에 수록된 단편들을 쓸 때 <딸에 대하여>를 쓰고 있었다. 2016년 여름에 썼는데, 그해에는 글을 열심히 썼고, 지난해에는 돈 버는 일을 열심히 했다. 이번 겨울에는 여행을 다녀왔다.

-<딸에 대하여>는 그린이라는 이름을 쓰는 딸과 레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딸의 동성 연인과 경제적 이유로 함께 살게 된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딸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는 엄마와 불화하는 딸쪽에 감정이입을 하리라 예상했는데, 신기하게도 읽다보니 내게 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의 감정에 더 이입되더라.

=<딸에 대하여>가 일인칭 화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그 일인칭 시점이 엄마의 그것이어서일 듯하다. 일인칭 화자를 딸로 바꿨으면 또 달랐을 수도 있지만. 그런데 질문을 받고 보니 지난해 생각이 난다. 지난해 연말 출판사에서 작은 서점들을 돌며 독자들을 만나는 행사가 있었다. 그런 일이 처음이라 부담스러웠다. 지나고 나니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책을 읽은 분들이 느낀 점을 정확히 이야기해줘서인 듯하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꽤 오셨더라. 그런데 누군가의 엄마인 그분들이 책을 읽으면서 딸에 대해 생각하리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누군가의 엄마로 오래 살았지만,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딸이 아닌 자기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를 딸로 놓는 게 익숙한 것이다. 우리 모두 딸로 태어났기 때문인 것일까? 신기한 경험이었다.

-<딸에 대하여>를 시작하게 만든 첫 장면이나 문장, 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장편을 쓸 때 계획하고 쓰지는 않는 편이다. 원래 <딸에 대하여>에는 지금 책에는 없는 한 챕터 정도가 더 있었다. 엄마가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 앞을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그 내용을 편집 과정 중에 덜어냈다. 사는 곳이 이 근처라 항상 시청 근처를 지나다니는데, 2016년 여름에 내가 퀴어퍼레이드를 봤던 기억, 그 장면을 썼던 것 같다. 처음 시작은 그랬다. 엄마가 딸이 아닌 다른 친구를 찾아가는 내용으로 써볼까도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바뀌었다. 다만, 화자가 나이 든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구체적으로 내용이나 인물, 결말을 정해두지는 않는 편인가보다.

=<중앙역>은 서울역 같은 느낌의 중앙역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정도의 그림을 마음에 두고 시작했고, <딸에 대하여>는 레즈비언 딸을 둔 50대 여성의 이야기 정도를 마음먹고 시작했다.

-그러면 퇴고 과정에서 많이 고치는 편인가.

=많이 고치지는 않는데, 소설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 일단 써서 편집자에게 보내주면, 편집자 피드백은 거의 다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중앙역>도 도입부 한 챕터를 아예 뺐다. 내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이 긴 모양이다. 쓰면서는 자각하지 못하는데, 나중에 퇴고할 때 보면 그렇더라.

-첫 페이지의 엄마와 딸의 대화부터가 인상적이었다. 딸이 “내 문자 못 봤어?”라고 묻자 엄마가 “그래. 전화를 해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어버리는구나” 하고 답한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나는 다만 그렇게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오히려 주말내내 딸애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이렇게 아무런 대안도, 방법도 없이 딸애와 마주앉아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모녀의 대화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회피하는 심리도 잘 보이고. 이런 장면을 보면서 현실에서 경험을 통해 쓴 에피소드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딱 맞아떨어진 에피소드는 없다. 엄마는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다. 호기심도 많고 나와는 다른 성격의 사람이다. 엄마는 자기 감정을 항상 100%로 전달하려는 사람이라서. 하지만 딸과 엄마가 싸우는 장면에는 내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엄마가 말도 안 끝냈는데 전화를 끊는다거나, 싸우고 나서 문을 쾅 닫는다거나. 엄마는 내가 글 쓰는 걸 반대하셨다. 나는 뭔가를 하고자 할 때 넘어야 하는 산이 늘 엄마였다. 엄마의 오케이 사인이 나야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승낙이 꼭 필요했고. 그런데 글 쓴다는 사실을 별로 안 좋아하셨다. 내가 서울에 가는 것도 싫어하시고 글을 쓴다고 하니까 더더욱 싫어하시고. 그래서 한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은 엄마가 오케이하고 서울에 가게 해주었지만, 그때 엄마와 했던 경험들이 여기 녹아 있겠지. 엄마가 서울에 보내주지 않으면 내가 돈을 벌어 가겠다며 집에서 나와 친구네 집에 가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친구 집 앞에 와 있었다. 친구 집은 대학가 앞 작은 원룸이라 살림살이가 거의 없었다. 그때 엄마가 밥솥을 새로 사왔더라. 별말 없이 그 밥솥만 주고 갔다. 그게 말하자면, 엄마의 허락이었다. 그때의 경험도 소설 안에 조금 있고.

-어머니들은 당신이 여자로 살았던 경험이 복합적이어서 그럴 테지만 다른 집 딸이 하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 딸이 하면 만류하는 경향이 있다. 글 쓰는 일도, 밥벌이가 안 된다, 남자가 싫어한다, 라면서. 딸이 결혼을 안 하면 어머니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딸에 대하여>에도 등장하지만 딸이 자신이 원한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잘못 낳았나 잘못 키웠나 자기 탓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맘이 아프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는 이번 책을 읽으셨나.

=읽으신 것 같다. 이번에 명절에 갔더니 그런 분위기다. 그런데 엄마는 이런 식이다. <중앙역>이 상을 받았을 때도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고 하시더라. 상도 받고 책도 냈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취직하라고 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도 그랬다. ‘동아일보 취직이랑 상관없는 거니?’ 하고 물으시더라. (웃음) 자리 하나 달라고 잘 말해보라고. 엄마는 내가 굉장히 불안정하게 산다고 생각하신다. 이번에 집에 갔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더라. 대구에도 교보문고가 있는데, 엄마가 “네 책이 잘 보이는 데 있더라” 하면서 좋아하시더라. 하지만 항상 관심사는, “돈은 언제 준다니?” “엄마한테 돈은 나눠줄 거니?” 이런 쪽이지만.

-제목 <딸에 대하여>는 편집자가 지었다고 들었다. 원고를 쓰는 동안 염두에 둔 제목은 따로 있었나.

=무슨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제목을 못 짓는다. 그래서 소설을 쓸 때도 제목을 짓고 시작하는 경우는 잘 없다. 첫 원고를 보낼 때는 딸과 그 동성 연인의 이름을 따 ‘그린과 레인’이라고 보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더라. 생각을 더 해보자기에 ‘과’를 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 역시 탐탁지 않아 했다. 마지막에는 ‘그린과 레인과 젠과 나’라고 보냈다. 결국은 편집자와 만났다. (웃음) 그때 민음사에서 일하다 지금은 외주 편집자로 일하는 분이 식사 자리에 동석했는데, 제목을 못 지어 고민이라는 얘기와 소설 내용을 듣더니 그분이 “딸에 대한 이야기네. 딸에 대하여”라고 하시더라. 그게 너무 좋아서 제목으로 삼게 되었다.

-혹시 <어비> 쓰기 전에, <중앙역> 이후 썼다가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도 있었나.

=장편이 있다. 두편, 어쩌면 셋일 수도 있는데. (웃음) 생각해보니, 장편을 쓸 때 기간이 오래 필요치 않은 편이다. 쓸 때는 하루 종일 글만 쓰니까. 집중력은 있지만 지구력이 강하지도 않고. 그 시기에 쓴 장편들은, 말하자면 실패한 소설들이다. 그런 경험이 일종의 워밍업?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딸에 대하여>를 쓰며 취재도 했나.

=영화를 많이 봤다. 특별히 취재 목적으로 본 건 아니지만. 2016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갔는데, 재밌는 영화들이 많았다. <불온한 당신>(2015)도 그때 봤고. 보려고 한 영화들이 매진이라 표가 남은 영화 중심으로 봤었는데 다 재미있었다. 요양원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니까 병원에 가서 앉아 있거나 하는 정도지 적극적으로 취재를 하지는 않았다.

-<딸에 대하여>는 딸에 대해 알아가는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입장을 딸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딸이 아닌 어머니 시점을 택한 이유가 있었나.

=소설 속 어머니는 이중적인 사람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딸을 이해해도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딸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하니까. 소설의 어머니가 주는 불편함이 내 안에도 있지 않나 생각하며 쓴 듯하다.

-여자가 혼자 할 수 있는 일로 글 쓰는 직업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등단을 한 뒤, 이른바 문단 사람들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있었을 것 같다.

=친한 사이인 또래 작가들끼리 교류를 한다거나, 무슨 궁리를 하는 걸 보면 부러울 때도 있기는 하다. 서로 이야깃거리도 많고 고민이 있을 때 물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하지만 막상 그런 만남을 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일 것 같다. 좋은 점도 있겠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런 걸 견딜 수 있는지. 남미에 여행가서 하루 종일 말을 안 할 때도 있었다. 한국인을 만나면 굉장히 반가운데, 한두 시간만 지나면 그들과 분리되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 양가적인 감정이 있다. 함께 뭘 도모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게 힘들겠다는 생각이.

-소설로 쓸 글감은 어떻게 찾나.

=데뷔를 하기 전이나 데뷔 직후에는 나로부터 먼 곳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이 나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있다. 요즘에는 내 반경 내에 있는, 나와 가까운 이야기들을 쓰게 된다. 내 일상, 내가 하는 생각이 전보다는 많이 들어가 있지 않나 싶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한다. <딸에 대하여>는 경장편이라 분량이 많지 않은데, 언젠가는 더 긴 호흡의 글을 써보고 싶다. 아주 긴 시간을 다루는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경외감, 해방감이 있는데 나도 언젠가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딸에 대하여>

‘나’는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담당 환자인 젠은 평생 약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왔지만 이제는 돌볼 가족 하나 없는 치매 노인으로 ‘나’의 돌봄을 받고 있다. 딸은 그린이라는 이름을 쓰며 레인이라는 동성 애인과 연애 중이다. 딸은 ‘나’에게 이사를 위한 돈을 해달라고 요구하는데, 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라 결국 두 사람을 집으로 들어오게 한다. 딸의 연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갈등하던 ‘나’는, 결국 ‘못내 외면하고 싶은 딸애의 사생활’을 직면하게 된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딸이 거리에서 시위하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뜻 딸의 편에 서지 못한다.

좋아하는 여성 작가_ 옥타비아 버틀러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마거릿 애트우드를 좋아한다. <>의 옥타비아 버틀러도 좋았다. <>은 SF인데 그 형식이 액티브하다고 해야 할까. 굉장히 에너제틱하다고 느꼈다. 말하려는 것까지 가는 서사의 속도가 정확하고 빠르다는 점이 부러웠다.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환상이나 판타지를 형식으로 잘 쓴다면 효과적으로 서사를 구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형식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내용보다는 플롯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인생의 영화_ <프레셔스>(2009)

<프레셔스>

“이 영화 얘기를 하면 다들 유치하다고 하는데… <첨밀밀>을 정말 좋아한다. 가장 여러 번 돌려본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인생의 영화’라면, <프레셔스>가 최근 몇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교훈적이기는 하지만 생동감이 있었다. 극중에서 캐릭터가 변화를 겪는데 그 변해가는 모습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모든 캐릭터를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선과 악이 분명히 갈리지 않아서 좋았다.”

원고 마감의 친구_ 맥주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

“원고 쓰다 막히면 맥주를 마신다.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데, 꼭 쓰는 내용과 직접 연관된 내용이 아니어도 아주 작고 소소한 무언가에 눈이 가고, 그것으로 실마리가 풀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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