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숀 베이커를 처음 만난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송경원 2018-02-28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 감독

<스타렛>

내놓는 작품마다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숀 베이커는 아마도 작가라는 명칭에 가장 어울리는 미국의 젊은 감독일 것이다. 천재, 혁신가로 불리며 오스카가 주목하는 그의 행보에 대해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1. 기발, 창의, 혁신

숀 베이커를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지만 그를 향한 찬사는 이 세 마디 안에 녹아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이크 아웃>으로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화제를 모은 후부터 숀 베이커의 행보는 곧 미국 독립영화의 현주소가 되었다. 영화광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자산을 영화에 녹여내는 대신 피해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흔히 말하는 인용이나 헌사 대신 여느 영화들의 색깔들을 조금씩 비껴가는 기발한 지점에서 영화를 출발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던 걸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익숙하되 조금 다른, 요컨대 자기 식으로 소화한 문법들을 선보이는 쪽에 가깝다. 가령 할머니와 포르노 여배우의 우정을 다룬 <스타렛>의 전반은 비밀을 밝히는 서스펜스 구조를 취하다가 어느덧 다큐멘터리가 일상을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한 <탠저린>은 아이폰5S로 촬영하여 화제를 모았지만 핵심은 오히려 정돈되지 않은 듯 폭주하는 클라이맥스의 화면 구성에 있다. 요컨대 숀 베이커 영화는 소재나 접근 방식이 먼저 눈길을 끌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파격적인 시도가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납득 가능한 형태로 정돈해내는가에 있다. 숀 베이커의 혁신 역시 단단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서는 장르의 응축물로 보일 정도다.

<탠저린>

2.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중국인 이민자(<테이크 아웃>), 포르노 배우(<스타렛>), 트랜스젠더(<탠저린>), 홈리스(<플로리다 프로젝트>)까지. 숀 베이커의 카메라는 일관되게 아웃사이더들에 주목한다. 단순하게는 “거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지만 이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흥미로운 질문들이 더해진다. 소외된 인물들을 다루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을 둘러싼 시스템이나 경계가 드러나게 되는 구조다. 조각을 통해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은 거꾸로 전체의 밑그림에서 조각으로 파고드는 이야기 구성을 통해 완성된다. 숀 베이커는 이에 대해 “특정 계층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덜 알려진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흥미를 느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그리하여 덜 소비된 이미지들에 좀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의 특질임에는 분명하다.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

3. 비일상의 일상화

숀 베이커는 특별한 이들을 특별하지 않게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영화 속 인물들 그 자체로 매혹적인 부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특별하고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의 삶 역시 실은 보편타당한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선보이는 이야기는 무난하고 관습적이며 안정적인 길을 따라간다. 다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들이 그 길을 걸을 때 그 행보 하나하나가 이채롭게 보이는 효과가 발생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화사한 색감도 눈길을 끌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건 마치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를 연상시키는 카메라의 위치다. 단순히 카메라를 흔들거나 인물의 뒤를 따르는 기교 때문만이 아니다. 기법적으로만 본다면 숀 베이커의 클로즈업은 로베르 브레송의 <무셰트>(1967)를 연상시킬 만큼 상징적으로 의미화되어 있다. 단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상징적인 형상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스타일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숀 베이커는 다르덴도 로베르 브레송도 아니다. 작가 감독들이 대상에 대한 감흥을 자신만의 형식으로 뽑아낸 것처럼 숀 베이커 역시 다양한 기교를 거치되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소화하려 시도한다. 일상 속 날것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건 결국 대상에 공감하되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 숀 베이커의 절제된 시선 덕분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4. 경계 지우기

인물을 따라가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고정하고 가만히 응시하기, 익스트림 롱숏으로 동선 관찰하기,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특정 상징들을 부각하기 등 숀 베이커의 카메라에는 특정한 습관이나 규칙이 없다. 정확히는 규칙이 생길 만하면 새로운 걸 시도한다. 그마나 대여섯편의 필모그래피에서 공통점을 찾자면 이 모든 구성이 철저히 상징화된 이야기를 따른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숀 베이커의 영화는 얼핏 보기엔 다큐멘터리에 더 가까운 인상을 풍기는데 여기엔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철저한 사전조사를 기반으로 한 현실, 아니 현장 반영이다. 별도의 세트를 짓지 않고 그 공간 그대로에 인물을 데려다놓고 상황을 찍는데 이때 장면을 축적해 나가는 방식이 다큐멘터리의 기본적인 방식과 닮았다. 거기에 현장감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인물들을 적극 캐스팅하는 걸로 유명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경우 스쿠티 역의 크리스토퍼 리베라를 현지 오디션으로 캐스팅했고 핼리 역의 브리아 비나이트는 인스타그램을 보고 감독이 직접 메시지를 보내 합류했다. 젠시 역의 발레리아 코토 역시 가족과 쇼핑을 하던 중 감독의 눈에 띄어 함께하게 됐다. 그렇게 신인배우, 비전문 배우들의 생동감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녹아 활력을 더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5. 공간의 영화, 철저한 사전답사와 리서치

아는 것을 찍는다. 이건 기본이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대상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이야기 소재로 끌고 오는 이들과 달리 숀 베이커의 영화는 발로 뛰고 몸으로 부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데뷔작인 <포 레터 워즈>는 사춘기를 막 지난 미국 청년들의 일상을 다룬 영화이고 중국인 이민자의 극적인 하루를 그린 <테이크 아웃> 역시 주변 인물의 삶을 탐방한다. 이후 작품들은 외부자로서 적극적인 조사 끝에 형태를 더듬어갔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기발하게 접근한 <탠저린>의 경우 무대가 되는 LA다운타운의 민낯을 생동감 있게 담아내기 위해 지역 주민들에게 무수한 리서치를 쌓아나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좀더 긴 시간을 들여 철저히 파고들었다. <스타렛> 제작을 위해 무수히 오가던 올랜도의 모텔들에서 이야기의 싹을 발견한 숀 베이커는 3년 가까이 US 하이웨이 192 도로를 오가며 인근 지역의 삶을 답사했다. 지역민들과의 인터뷰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는데,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바비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 모텔의 매니저였던 존 매닝을 만나 모텔에 기거하는 숨은 홈리스들의 삶을 자세히 조사한 것뿐만 아니라 영화의 방향을 틀어 주요 캐릭터 중 하나로 반영한 것.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티와 짙은 사회 반영성은 이러한 태도에 기반한다.

필모그래피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6 <스노버드> 2015 <탠저린> 2012 <스타렛> 2008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 2004 <테이크 아웃> 2000 <포 레터 워즈>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