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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버천 회고전 부문
2002-04-19

미국 인디, 그 불온한 상상력의 최전선

“프로듀서 크리스틴 버천은 아직 자신이 싫어할 만큼 이상한 프로젝트를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틴 버천(1962∼)에 대한 기사의 첫 문장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데슨 호는 이렇게 표현했다. 96년 8월, 버천이 제작한 <스톤월>의 개봉을 앞둔 때였다. 얼핏 들으면 악담 같지만, 1∼2년에 한번쯤은 미국영화계에 논쟁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독립영화를 선보이곤 하는 버천에게는 해로울 것 없는 수사다. 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토드 헤인즈의 91년작 <포이즌>부터 <졸도> <고 피시> <세이프> <스톤월> <키즈>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등등 실제 버천이 손댄 영화들은 주류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시선과 돌파력을 지녀왔으니 말이다.

이는 때로 원인 모를 질환에 시달리는 중산층 여성의 이야기인 <세이프>에서처럼 안정된 이성애 문화가 실은 질병 못지않은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미묘한 퀴어적 발언일 수도, 가부장제적 권위를 파괴하기 위해 남성을 제거하자는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의 발레리 솔라나스의 과격한 직설일 수도 있다. 혹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거리를 활보하며 오로지 섹스에만 탐닉하는 <키즈>의 10대들처럼 기성세대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거친 욕망의 배설로 드러날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버천이 제작한 영화들은 성적소수자를 포함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상대적인 약자들에 대한 시선을 담보하면서 문제제기를 서슴지 않았다. 스스로 “도발이라 생각되는 것들에 끌린다”며 “젠더를 둘러싼 이슈는 물론 흥미롭고 도발적”이라는 버천은 90년대 미국 뉴퀴어시네마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상업영화에서 쉽게 다루지 않는 삶의 불온한 구석에 주목하는 독립영화계의 전투적인 여성프로듀서로 자리매김해왔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런 버천에게, “정치적 태도가 명확한 영화들의 대모”란 수식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영화제에서 마련된 크리스틴 버천의 회고전은, 90년대 미국 독립영화의 한 계보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포이즌>부터 <소년은 울지 않는다>까지, 버천과 96년에 설립한 그의 영화사 킬러 필름즈의 작품 중에서 10편을 모았다.

독약 Poison

토드 헤인즈. 미국. 1991년

<벨벳 골드마인>으로 국내에 알려진 토드 헤인즈의 장편 데뷔작 <독약>은 호러, 실험영화, 다큐멘터리와 SF가 뒤섞인 기묘한 영화다. 성욕의 근원이 되는 호르몬을 발견하고 과다복용한 뒤 질병에 시달리는 과학자, 동성애 관계에 집착하는 감옥의 죄수, 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뒤 자신을 둘러싼 세계 밖으로 날아가버린 아이. 별 연관성이 없어보이는 이 세 가지 이야기들은, 남성 중심적인 이성애 문화에 독약처럼 퍼져 있는 억압성을 드러내는 기제란 점에서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엄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없애고 싶었던 아이는 욕망을 실현하지만,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이탈해버린다. 성적 힘과 함께 질병을 얻은 과학자는 마음과 달리 상대를 죽이는 방식으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다. 성적인 강박과 억압에 대한 은근하고도 기묘한 진술을, 토드 헤인즈 특유의 리듬감 있는 카메라워크로 잡아냈다.

졸도 Swoon

톰 칼린. 미국 1992년

<졸도>는 1920년대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리처드 로브와 네이선 레오폴드 주니어 사건에 시선을 둔 또 하나의 영화다. 두 대학생이 바비란 소년을 살해한 이 사건은, 상류층 출신에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충동적인 유희에 가까운 살인이라는 것, 무엇보다 그들이 게이 연인이란 점에서 당대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드식 정신분석이 지배적이던 당시에는 동성연애를 정신이상의 증거로 삼은 변론으로 사형 대신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고, 같은 사건을 변주한 히치콕의 <로프>나 리처드 플레이셔의 <컴펄션>은 동성애의 문제를 아예 누락시켰지만, <졸도>는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게이 인권활동가이기도 한 톰 칼린은 권위적인 로브와 그에게 얽매이는 레오폴드의 성적 역학관계에 주목하면서, 비정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적인 게임으로서의 범죄를 벌인 이들의 내면을 탐구한다.

고 피시 Go Fish

로즈 트로체. 미국. 1994년

흑백영화인 <고 피시>는 대학가 근처에 사는 여자 친구들의 소소한 일상과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다. 좀 다른 점이라면, 이들 여성 주인공들의 사랑의 상대 역시 여성이라는 것. 오랫동안 혼자였던 맥스,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교수인 키아, 그리고 그녀의 제자뻘 되는 엘리, 키아가 연모하는 이혼녀 에비 등 여성들의 작은 공동체 속으로 파고든 카메라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촘촘한 수다와 함께 보여준다. 레즈비언들의 연애를 소재로 했지만, 행여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 이야기를 나누던 엘리와 맥스의 시선이 교차하며 수줍게 입맞춤을 나누는 순간처럼, 감정의 흐름을 세심하게 배려한 연출은 인물들의 교감을 아기자기한 일상으로 담아낸다.

스톤월 Stonewell

나이젤 핀치. 미국. 1995년

1969년 뉴욕, 스톤월바는 게이 공동체들의 작은 해방구다. 하지만 짙은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드랙퀸들도 맘껏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낼 수 있는 이곳조차, 이성애 질서의 폭력적인 권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뉴욕에서는 자신의 성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집을 떠나온 매티는, 스톤월에서의 첫날밤 경찰들의 습격을 목격한다. 두드려맞고, 범법자 취급을 당하는 게이들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싸움을 준비한다. 드랙퀸인 라미란다는 어디서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감추지 않으려 하고, 필라델피아에서 시위를 준비하는 게이 그룹은 시위 때 남성 정장을 입는 타협안을 고민한다. 게이 해방운동의 시작을 돌아보는 <스톤월>은 게이들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지만, 드랙퀸들의 립싱크 쇼를 비롯한 형식은 오히려 경쾌하다. 에이즈로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프로듀서인 버천과 함께 편집을 마친 감독 나이젤 핀치는,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샀다.

키즈 Kids

래리 클럭. 미국. 1995년

<키즈>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맨해튼의 밤거리를 누비며 섹스에 탐닉하는 10대들의 하룻밤을 좇는 영화다. 텔리는 성적 경험이 없는 처녀들을 찾아내 섹스를 나누는 것에만 골몰하는 10대 소년. 그에게 여자애들과의 섹스란 친구 캐스퍼에게 몇분쯤 과시하듯 떠들어댈 수 있는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다. 뉴욕의 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술과 마약, 섹스로 뒤엉킨 밤을 보내는 이들의 세상은 철저히 그들만의 것이다. <키즈>의 카메라는 섣부른 가치 판단이나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시선으로 미국 10대들의 문화 자체를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텔리와 첫 섹스를 나눈 뒤 에이즈 판정을 받고 헤매는 제니까지, 출구없이 내던져진 아이들은 사회의 무관심과 방관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에서 개봉 당시 포르노그라피 논쟁과 함께 격렬한 찬반을 불러일으켰던 <키즈>는, NC-17등급 판정을 거부하고 등급 외 개봉을 택했음에도 제작비의 4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성공을 거둬들였다.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I Shot Andy Warhol

메리 해런. 미국. 1996년

97년 제1회 여성영화제에서 소개된 바 있는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는, 60년대의 급진적인 여성작가 발레리 솔라나스의 궤적을 좇는 영화다. 성적학대를 받은 유년의 기억과 빈곤에 시달리는 발레리는 매춘으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다녔다. 대학신문에 남성을 완전히 배제한 여성들의 생존에 대한 급진적인 글을 기고하곤 했던 발레리는 ‘남성 근절협회’인 S.C.U.M.을 주창할 만큼 적극적인 여성주의자이자 행동가. 우연히 앤디 워홀의 스튜디오이자 친교의 장인 ‘팩토리’를 방문해 워홀을 알게 되고, 자신이 쓴 희곡을 건넨다. 하지만 연극으로 만들기는커녕 원고마저 돌려줄 기미가 없자, 화가 난 발레리는 워홀에게 총을 들이댄다. 여성주의라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발레리의 광기 어린 에너지는, 독립영화계의 스타 릴리 테일러의 연기로 생기를 얻었다.

행복 Happiness

토드 솔론즈. 미국. 1998년

겉보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세 자매와 그들을 둘러싼 인간군상들의 일상으로 걸어들어간 <행복>은, 제목과는 거리가 먼 영화다. 막 남자친구와 헤어진 조이와, 자신을 따르는 남자들 얘기를 늘어놓는 헬렌, 평범한 가정주부인 트리시. 트리시의 남편인 빌은 정신상담의지만, 남모르는 성적도착증을 갖고 있다. 빌에게 상담을 받는 앨런은 온갖 포르노적인 상상을 들려주지만, 번번이 매력없는 자신에게는 다가오지 않을 판타지라는 결론에 좌절한다. “<행복>은 닫힌 문들에 대한 영화다. 아파트 문, 침실 문, 무의식의 문”이라는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말대로, <행복>은 굳게 닫힌 소통의 문을 면벽한 사람들의 처연한 풍경으로 가슴에 앙금을 남긴다. 치한이란 소리를 듣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캐묻는 아들과 덤덤하게 긍정을 내뱉는 빌의 대화처럼 건조한 듯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얽히고 설킨 욕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토드 솔론즈의 시선은 한결 깊어졌다. 황혜림 blauex@hani.co.kr▶ 2002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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