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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란티모스의 영화적 어휘와 비유법

실패한 인과율을 조형하는 불협화음 스타일

화면이 열리자마자 펄떡거리는 심장이 시야를 육박해 들어온다. 혀를 날름대는 외계생명체와 같은 위협적 이미지로부터 카메라가 느린 템포로 트랙 백하면 수술 부위를 봉합하는 외과의사의 분주한 손길이 겹친다. 슈베르트의 <마태 수난곡>을 배음으로 깐 이 불문곡직(不問曲直)의 오프닝은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과 정서를 다음과 같이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유혈이 낭자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이고, 심장의 박동과 멈춤(생명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순환할 것이며, 서사는 작은 범위에서 큰 곳으로 옮아갈 것이다.” 예고는 현실이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고대 비극을 재작업한 것으로 알려진 <킬링 디어>는 주류영화의 미학과 정치학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신화에 대한 개작과 급진적인 재현 전략을 활용한다. 다다이스트의 호러 쇼라고 할 만한 이 우화를 통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희생자를 격앙시켜 죄를 촉발한 측과 그에 희생된 측을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살육의 순환을 그린다.

<키네타>(2005)와 <송곳니>(2009), <알프스>(2011),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로 이어지는 란티모스의 평판작들은 국가, 가족, 종교, 대인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의 파괴, 약화된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하는 인간을 다룬다. 기이함(weirdness)으로 정의되는 란티모스 영화의 새로움은 제재나 묘사 수준의 괴이함이 아니라 가상의 패턴을 답습하기를 거절하는 미학의 급진성에 있다. 그다지 쟁점화되고 있지는 않지만 마틴(배리 케오간)의 아버지가 스티븐(콜린 파렐)의 과실에 의해 사망한 것인지는 끝까지 명료하지 않다. 스티븐이 음주 상태로 수술을 집도했다는 것 외에 드러난 사실은 없다. 단정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육박해오는 비극은 스티븐의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가족에 닥친 비극은 초자연적인 현상인데, 그것이 마틴의 저주 때문이라는 증거는 확실치 않다. 어떤 합리적인 설명 없이 이 가족은 재앙을 맞는다. 그들을 덮친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하는, 신성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처벌이다. 이처럼 ‘실패한 인과율’의 서사로 <킬링 디어>를 독해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당신이 벌였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처벌에 직면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이한 뉴웨이브’로 정의되었던 현대 그리스영화의 기린아인 란티모스는 여기서 ‘불협화음의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간접적이고 시적인 형상화를 통해 존재의 위기를 암시한다. 실패한 인과율은 불협화음의 형식과 조응한다.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갑갑한 실내극 형태로 연출된 다수의 장면에서 카메라의 셋업은 한결같다. 숏 크기의 비약, 카메라 운동의 방향 전환, 전체를 조망하기 어려운 파편화는 화합 불가능의 상태로 갈라진 운명의 아이러니에 관한 양식화이다. 의미가 증류되어 나오는 다수의 장면들을 주재하는 재현의 전략은 몽타주적인 방식, ‘충돌’이다. 상징적인 오프닝 뒤에 배치된 스티븐과 마틴의 버거킹 만남 신에서 카메라의 운동 방향은 이전 시퀀스와 충돌한다. 스티븐과 마취과 의사의 대화를 좇는 병원 복도에서의 큐브릭적인 스테디캠숏은 후방을 향하는 움직임이지만, 이어지는 버거킹 신에서 카메라는 전방으로 향한다. 리듬과 속도도 미묘하게 달라졌을 뿐 아니라 방향을 역전시키면서 시청각적 긴장이 조성된다. 그 뒤를 잇는, 스티븐과 마틴이 마주한 공간의 마스터숏은 CCTV 이미지이다. 거리감을 과장하는 렌즈로 찍힌 이 영화의 마스터숏은 어김없이 CCTV의 그것이다. 폐쇄회로의 상(像)을 엿보는 것 같은 인상을 창조하면서 먼 곳에서 응시하던 카메라는 다음 숏에서 급격히 인물의 얼굴에 밀착한다. 교각 아래에서의 스티븐과 마틴의 대화 신, 스티븐이 연사로 나선 학회 신, 스티븐 가족의 식사 신 등에서 이 같은 충돌의 전략이 관철된다.

란티모스가 사용하는 이러한 영화적 어휘와 비유법은 때때로 난삽하고 혼란된 스타일로 나타난다. 이 무질서한 난설(亂說)은 영화언어의 표준 질서를 어지럽힌다. 유머와 부조리, 변덕스러움 그리고 기이함을 혼합한 스타일은 이상하게 연극적이고, 때로는 잔인한 세상을 창조한다. 몇몇 비평가들에게 불친절함으로 원성을 산 <킬링 디어>의 내러티브는 서사 정보를 제시하는 유습에 정면으로 맞선다. 초자연적인 현상의 귀결로 치부되는 오컬트적인 설정은 명시적 정보가 아닌 암시로 대체된다. 거식증, 하반신 마비, 안구 출혈의 단계로 진행되는 킴(래피 캐시디)과 밥(서니 설직)을 향한 저주는 은근하게 암시된다. 마틴이 스티븐의 집을 처음 방문하여 킴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밥의 시선으로 매개되는 이 신에서 카메라는 느닷없이 마틴의 다리를 잡는다. 텅 빈 공백 지대처럼 연출된 이 숏은 점진적으로 의미를 증류해내는 강인하고 독기가 넘치는 이미지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우화가 현대 미국으로 옮겨와 해석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려는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란티모스는 도상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미국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의 1948년작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는 네 다리로 걷는 짐승의 형상을 한 스티븐의 아이들에 관한 도상적 레퍼런스다. 퇴행성 신경근 질환으로 고통받은 와이어스의 친구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상체를 전방으로 향하면서 하체를 끌어당기는 반신불수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뒷모습으로 그려진 여인의 시선은 그녀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언덕 위의 집을 향해 있다. 와이어스의 그림이 자아내는 긴장의 핵심은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으나 그 실질은 움직인다고 할 수 없는 불구의 아이러니이다. 사슴의 형상을 닮은 네발로 걷는 아이들, 이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적인 도상은 쇠잔해져가는 육체와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손쓸 수 없는 무력감을 신체의 제스처를 통해 구현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제스처를 ‘인간 내면의 순전한 표출’로 정의하였다. <킬링 디어>에서 배우들의 연기 방식은 중요한데, 그들의 목석같은 연기는 동물의 제스처를 모방한 전신안무의 결과이다. 란티모스는 무성영화의 안무를 연출하듯 배우들에게 로봇처럼 연기하도록 주문한다. 밥이 사지를 복도에 붙이고 걸을 때, 마틴이 감금된 밀실 바닥을 킴이 기어다닐 때, 저 고대 신화의 희생제의에 봉헌된 사슴의 형상이 겹치는 것이다. 제스처는 익숙한 사회적, 정치적 규범이 중단된 어리석은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여준다. 어둡고 유머러스한 어조는 진실하고 즉각적인 경험을 방해하는 세계와의 추상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답변이 없는 결론으로 미궁의 구조를 던진 것처럼 보이지만 비극의 종말과 함께 온 카타르시스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론을 이 영화는 제시하고 있다.

<킬링 디어>는 세속적인 세계를 파괴하는 부조리에 대한 매혹을 통해 세속에 대한 환멸을 중단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존재는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어두움이라는 것, 존재의 유일한 소명은 육체의 언어로 구제의 드라마를 써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의 클로징을 보자. 밥이 사라진 후 이 가족을 압박해오던 공포는 슬며시 사라진다. 스티븐은 안나(니콜 키드먼), 킴과 버거킹에 앉아 있다. 그때 다리에 총상을 입은 마틴이 절룩거리며 들어온다. 마틴은 스티븐과 자신이 앉았던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 가족을 쳐다본다. 스티븐과 안나는 마틴이 스쳐가는 것을 본다. 그들의 표정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직전까지 초주검 상태였던 킴은 건강해 보인다. 킴은 감자칩 위에 케첩을 뿌리고, 거식증을 극복한 듯 햄버거를 먹는다. 킴이 감자칩을 다 먹었을 때 그들은 재킷을 입고 나간다. 킴은 일어서서 마틴을 잠깐 살피고 부모를 따라간다. 그녀는 정상적으로 걷고 있다. 킴의 다리는 치료되었고 마틴의 다리는 상했다. 이 장면에서 주의를 끄는 것 역시 서사 정보의 확실성이 아니라 시청각적 진술에 의한 암시와 제스처다. 오프닝과 클로징의 운을 맞추면서, 란티모스가 그려내려 했던 세계는 불합리하다. 불합리한 세계를 진단하기 위해 자연주의보다 신비주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미지의 조형성과 카메라의 화용론은 이 영화의 임상적 비주얼 스타일, 무의식에 각인된 복수라는 주제, 제스처의 미학에 관한 깊은 의미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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