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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나의 저주>를 계기로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를 생각함

이야기꾼의 안이함

2013년 <컨저링> 시리즈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워런 부부는 호러 팬들에게 유명 인사였다. 소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귀신영화나 텔레비전물이 나올 때면 그 사건을 맡은 워런 부부의 이름이 어딘가에 박혀 있거나 극중 캐릭터가 이들을 모델로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워런 부부는 20세기 호러물에 지울 수 없는 하나의 틀을 만들었다. 악령에게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초자연현상 전문가. 이들이 없었어도 이 틀은 존재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는 워런 부부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컨저링> 유니버스 영화를 통해 안다. 나에겐 이게 굉장히 이상해 보인다. 초자연현상을 다룬 호러영화를 만드는 것이 금지된 중국이나 베트남에 사는 게 아니라면, 워런 부부의 사건 파일에 실린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귀신 나오는 호러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워런 부부가 맡은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실명으로 등장시키는 것도 자연스럽다. 워런 부부가 보관하고 있는 귀신 들린 인형을 주인공으로 스핀오프를 제작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주인공인 유니버스를 만들어 귀신영화를 만드는 건 좀 다른 일이다. <컨저링> 영화들의 가장 막강한 무기가 무엇인가. 영화가 그리는 사건이 실화라는 것이 아닌가. 초자연현상을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 사람들은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하긴 한다. <컨저링> 영화의 고정 관객이라고 워런 부부의 주장을 다 믿는 건 아니다. 전혀 믿지 않는 관객이라도 이 영화를 즐기는 건 가능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초자연현상에 대해 입장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주연배우들이 실존 인물과 이렇게 밀접한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허구의 이야기로 유니버스를 확장하는 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슷해 보이지만 전작들과는 다른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보건 말건 <컨저링> 유니버스는 넓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세편의 <애나벨> 영화가 나왔고 <컨저링 2>(2016)에서 이명박 닮은꼴로 화제가 됐던 수녀 귀신이 악역으로 나오는 <더 넌>(2018)이 나왔고 얼마 전에는 <요로나의 저주>가 개봉했다. 이들 중 <애나벨> 시리즈의 2편인 <애나벨: 인형의 주인>(2017)은 기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다.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에서 한참 떨어져 있긴 하지만. 실화와 <컨저링> 유니버스를 연결하던 마지막 연결고리인 로레인 워런이 세상을 떴으니 이 세계의 이야기는 점점 더 막 나가지 않을까? <요로나의 저주> 이야기를 해보자. <컨저링> 유니버스의 이야기가 모두 그렇듯 이 영화의 시대배경도 20세기 후반, 그러니까 1973년이다. 경찰 남편을 잃은 주인공 안나 테이트 가르시아는 두 아이를 키우며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안나는 파트리시아 알바레스라는 여자가 자신의 두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 안 벽장에 감금하자 아이들을 엄마로부터 격리시킨다. 파트리시아의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아 초자연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한다. 안나는 이들의 죽음에 ‘라 요로나’라는 악령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악령의 다음 타깃이 바로 자기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전문가들을 불러오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다. 다행히 안나가 찾아간 페레스 신부는 사제 출신이지만 다른 접근법을 쓰는 전문가인 라파엘 올리베라를 소개시켜준다. 아, 그리고 페레스 신부는 <애나벨>에도 나왔다. 이렇게 안나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컨저링> 유니버스에 통합된다.

이 스토리 전개는 앞에 나온 두편의 <컨저링> 영화와 흡사하다.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고통받는 가족과 이들을 구하러 온 초자연현상 연구가. 단지 이들을 갈라놓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워런 부부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이 이야기의 타이틀롤 라 요로나가 원래부터 멕시코 문화권에서 잘 알려진 슈퍼스타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에도, 남편에게 애인이 생긴 사실을 알게 되자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죽였다는 이 흐느끼는 유령이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라 요로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민속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 요로나와 같은 인기 있는 유령의 등장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컨저링> 영화들과 <요로나의 저주>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후자는 (더) 장르화되어 있다.

이 차이는 참 오묘하다. <컨저링> 역시 장르화된 이야기일 테니.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귀신영화, 또는 귀신 들린 집 영화로 분류되는 장르는 좀 까다로운 구석이 있다. 이들 상당수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서브 장르보다 더 ‘현실성’을 추구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헌팅> 같은 인기 재현 프로그램은 시즌10 동안 꾸준히 귀신과 귀신들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그것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내용의 미니 호러영화였다. 이 따분할 수 있는 이야기의 반복을 10년 이상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실화’라는 인증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전문가 중 워런 부부가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

<요로나의 저주>는 괜찮게 만들어진 영화다. 아역들을 포함한 배우들의 연기가 좋고 현실 논리를 깨트리며 공포를 창출해내는 몇몇 매력적인 아이디어도 있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디어의 구현은 굳이 실화인 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 요로나의 등장과 함께 20세기 후반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멕시코 사람들의 문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워런 부부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깊이 파지는 못했을 테니 라파엘 올리베라의 등장도 의미가 있다. 이 영화는 실화 소재의 <컨저링> 영화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영역에 있다. 하지만 <요로나의 저주>는 <컨저링>처럼 고만고만한 이야기에서 안주해야 할 ‘실화’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컨저링> 영화와 달리 <요로나의 저주>의 익숙함이 더 식상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컨저링>에서 사실의 추구였던 것이 <요로나의 저주>에서는 이야기꾼의 안이함처럼 보인다. 이는 영화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기 질문이 있다. 비현실적인 공포 현상을 실화라고 내놓으며 만든 허구의 유니버스에서 그 공포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최대한 다양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이야기의 씨앗이었던 ‘사실’의 씨앗을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빛과 그림자로 만들어진 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워런 부부는 어떤 답을 갖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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