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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맨>, 혹은 음울한 만화영웅들의 신세기 영화세상 점령기
2002-05-04

만화가 낳은 어둠의 자식들 스크린을 삼키다

21세기의 할리우드는 거대한 만화 가게를 방불케 할 것이다. 88년의 <배트맨>부터 <블레이드> <엑스맨>과 같은 영화들로 인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감독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을 과시할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2002년 여름, <스파이더 맨>은 원작만화 40년만의 첫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다.

만화책 컬렉션을 팔아 영화제작 비용을 마련했다는 만화광 출신 감독들의 뒷이야기, 그리고 만화 혁명으로 촉발된 수퍼 히어로의 변화와 만화광들이 주도하는 만화의 영화화의 의미를 영화평론가 김봉석이 짚어보았다. 그리고 <스파이더 맨> 감독 샘 레이미의 인터뷰는 무엇이 슈퍼 히어로들을 잠에서 깨웠는지를 좀더 분명하게 알려줄 것이다.

격렬하고 선동적인, 성인을 위한 ‘그래픽 노블’이 낳은 만화광들이 할리우드로 갔을때, 그 21세기 극장의 풍경을 미리 만난다. 여기, 쌍생아처럼 닮은 듯하지만 어쩌면 다른 만화와 영화, 그리고 ‘만화 같은 영화’세상이 펼쳐진다. 편집자

“영웅이 없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스파이더맨>의 뒤를 이어 <헐크> <데어 데블> <판타스틱 포> <배트맨: 이어 원> <엑스맨2> <블랙 팬더> 등의 슈퍼 히어로가 연이어 등장하는 21세기는 불행한 시대일까? 78년 <슈퍼맨>, 88년 <배트맨>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슈퍼 히어로의 스크린 입성은 수월하지 않았다. 만화 주인공과 블록버스터의 만남은 이상하게도 삐걱거렸다. 성공한 <마스크>와 <맨 인 블랙>의 원작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었고, <스폰>과 <블레이드>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약간 마이너 취향으로 만들어졌다. <배트맨>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는, 극장까지 가서 만화의 주인공을 만날 관객이 다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90년대 초반까지는.

<매트릭스>, 만화적 상상력의 승리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세기가 바뀐 것만이 아니라, 미국 만화의 위상이 바뀌었다. 21세기 액션영화의 유행을 선도한 작품은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다. <매트릭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중에 날아오른 여자가 중력의 법칙을 외면하는 것처럼 붕 떠 있는 장면. 초고속촬영으로 잡아낸 이 장면은, 만화에서는 익숙한 광경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트릭스>의 미술디자인을 담당하고 스토리보드를 그린 제프 다로가 자신의 만화에서, 총에 맞은 사람의 모습이나 자동차의 충돌을 묘사하면서 애용하던 장면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만화 출판사인 마블 코믹스에서 스토리를 썼고, <어쌔신>의 시나리오를 거쳐 <바운드>로 데뷔했다. <매트릭스>는 만화적 상상력만이 아니라, 만화의 혈맹인 애니메이션의 테크닉까지 체화한 첨단의 액션영화였다.

현재 할리우드는영화의 자식에 이어, 만화의 자식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가장 유명한 만화의 자식은 케빈 스미스. 그가 감독한 <섀넌 도허티의 몰랫츠>에 등장하는 만화에 미친 주인공은, <스파이더맨>의 창조자 스탠 리에게 조언을 받아 사랑고백에 성공한다. 만화광인 케빈 스미스는 자신의 만화책 컬렉션을 팔아 <클락커즈>를 만들 비용을 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클락커즈>에 이은 연이은 성공으로 다시 컬렉션을 돌려받았다). 돈을 번 케빈 스미스는 자신의 고향 뉴저지에 코믹북 전문상점을 열었고, 어니 프레스라는 만화 출판사도 설립했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연기하던 영화 속 등장인물 ‘사일런트 밥’의 만화도 출간했다. 95년에는 그토록 염원하던 <슈퍼맨>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지만, 팀 버튼이 거절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사이가 나쁘다는 후문이다. 케빈 스미스는 그뒤 마블 코믹스에 발탁되어 <데어 데블>의 스토리를 쓴 것에 이어, DC 코믹스에서는 <그린 애로우>를 쓰고 있다.

<언브레이커블>의 M. 나이트 샤말란도 만화 마니아다. <언브레이커블>에는 20세기 초에 나온 만화의 원화나 초판들이 선보일 뿐 아니라, 내용 자체가 슈퍼 히어로 탄생 비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정도로 전형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만화광들은 <언브레이커블>의 뒷이야기를 원하지만, 샤말란은 시리즈를 만들 생각이 없다. 팀 버튼이 감독하려던 <슈퍼맨>의 속편에 출연하기로 했던 니콜라스 케이지는 <슈퍼맨> <고스트 라이더> 등의 열렬한 팬이다. <블레이드2>를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도 만화광으로 알려져 있고, <헬보이>와 오토모 가쓰히로의 <동몽>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고 한다. 웨슬리 스나입스는 블레이드에 이어 마블의 또 하나의 흑인 캐릭터 블랙 팬더를 연기할 예정인데, <블랙 팬더>의 감독으로 내정된 존 싱글턴도 만화광이다. <헐크>의 리안과 <배트맨: 이어 원>의 대런 애로노프스키도 마찬가지. 팀 버튼의 <배트맨>이 만들어진 뒤, 만화 원작영화는 감독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을 과시할 수 있는 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침하고 폭력적인, 그래서 사실적인 영웅들

할리우드에 존재하는 수많은 만화광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미국 만화는 80년대 중반, 전세계를 휩쓸었던 68년의 영화혁명에 비견될 수 있는 거대한 혁명을 겪었다. 그리고 꾸준히 만화를 지켜보던 독자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워치맨>으로 시작했다.

두 작품이 등장하기 전 미국 만화계는 파멸 일보직전이었다. 50년대 괴기극화 전문이던 EC 코믹스의 잔혹묘사 때문에 벌어진 만화 반대운동을 타개하기 위해서, 만화 업계는 자체 검열로 폭력과 섹스를 규제했다. 슈퍼 히어로는 아이들을 위한 건전한 권선징악의 영웅일 뿐이었다. 70년대 이후 아이들이 만화에서 멀어지고, 독자층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마니아 독자의 비율이 증가했다. 독자가 줄어들자 출판사는 머천다이징과 특별판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질에서 여전히 구태(舊態)를 벗어나지 못하던 코믹스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워치맨>으로 히어로의 유년기를 마감한다.

슈퍼 히어로는 음침하고, 폭력적이고, 심각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프랭크 밀러와 앨런 무어는 일면적인 영웅의 모습에 과격한 묘사와 정치, 철학을 집어넣어 ‘성인의 문학’으로 재생시킨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급진적으로 당시 레이건 정권의 냉전구조를 비판하는 내용을 다루면서, 정의의 편이던 슈퍼 히어로가 반정부분자가 되어 정부에 탄압받는 내용까지도 등장한다. 스토리만이 아니라 표현 테크닉도 복잡해지고 더욱 실험적이 된다. 모든 면에서 아이들의 이해수준을 뛰어넘는, 명실상부한 성인의 ‘그래픽 노블’이 된 것이다.

80년대 만화계의 프랭크 밀러는, 90년대 영화계의 타란티노 이상으로 평가된다. 프랭크 밀러는 진부한 틀에 갇힌 장르를 어둡고 폭력적인, 리얼한 성인의 세계로 재구성했다. 80년대 초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등의 스토리를 쓰던 프랭크 밀러는, <데어 데블>로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 밀러는 모든 악의 근원인 뉴욕의 슬럼가 헬스 키친을 극렬하게 묘사하며, 헤로인 중독의 고교생을 등장시키는 등 파격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정의를 위해 싸우던 단순한 슈퍼 히어로는 복잡한 내면을 가지게 되고, 선악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순간까지 이른다.

데어 데블은 맞서 싸우는 악당들보다도 야비하고, 폭력적이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악당의 부인을 인질로 잡고 협박까지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덕에 데어 데블은, 최고의 인기였던 울브린을 한때 능가하기도 한다. <데어 데블>의 성공으로 DC 코믹스에서 오리지널 작품의 기회를 얻은 프랭크 밀러는 <로닌>을 낸다. <아이를 동반한 검객> 같은 일본의 시대극과 사이버 펑크를 결합한 작품이다.

86년에 발표한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슈퍼 히어로의 정의를 다시 내린 문제작이다. 50살을 넘어 이미 은퇴한 배트맨. 희망을 잃어버린 레이건 정권하의 미국은 악화일로다. 사악한 범죄자들은 정신이상을 이유로 풀려나고, 결국 배트맨은 다시 거리의 기사로 돌아온다. 연령의 핸디캡을 메우기 위해 중화기, 파워 수츠, 13살의 소녀인 로빈의 도움을 받아서. 하지만 잔인하게 범죄자들을 사냥하던 배트맨은 ‘법치’국가의 적이 되고, 정부에 고용된 슈퍼맨과 대결한다. 배트맨은 과연 정의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단지 광기에 사로잡힌 것일까. 그것은 <배트맨>의 창조자인 밥 케인이 애초에 묘사했던 배트맨의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뒤 프랭크 밀러는 니힐리스트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을 양산한다. 제프 다로가 그린 <하드보일드>, 연인이 살해당한 남자가 직접 복수의 총을 들고 범죄자를 처형하는 <신 시티>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밀러는 만화의 검열에 철저하게 대항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스파이더 맨>, 혹은 음울한 만화영웅들의 신세기 영화세상 점령기 (1)

▶ <스파이더 맨>, 혹은 음울한 만화영웅들의 신세기 영화세상 점령기 (2)

▶ 1986년까지, 미국 슈퍼 히어로 만화 소사

▶ <스파이더맨> 감독 샘 레이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