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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만난 감독들④] <그곳, 날씨는> 이원우 감독 - 볼티모어로부터의 편지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20-03-12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는 숲속 풍경과 시시각각 뒤바뀌는 온갖 영상들이 겹친다. 타임랩스 기법(저속촬영해 정상 속도보다 빨리 돌려서 보여주는 특수영상기법)으로 촬영된 숲속은 실제 물리적인 시간보다 더 빠르게 재생된다. 화면 하단에는 촬영한 날짜와 시간 그리고 카메라 기종이 표기되어 있다. 촬영한 시간과 날씨에 따라 숲속은 매번 다른 얼굴을 한다. 그런 숲속 위로 포개져 나타나는 영상은 일상의 연속이다. 숲속은 2018년 7월부터 2019년 2월까지 미국 볼티모어에서, 여러 일상은 서울에서 찍은 영상이다. 이원우 감독의 신작 <그곳, 날씨는>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찍은 영상들이 겹쳐진 독특한 영화다.

이원우 감독은 지난 2015년 가족과 함께 돌연 미국 볼티모어라는 도시로 떠났다. 필름을 활용한 영상을 작업하는 집단 ‘셀’ 출신인 그는 <난시청>(2008), <거울과 시계>(2009), <살 중의 살>(2010), <두리반발전기>(2012) 등 사적 실험 단편들을 작업했고, 문정현 감독과 함께 다큐멘터리 <붕괴>(2014)를 공동 연출했으며, 스파이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삶을 그린 장편 <옵티그래프>(2017)를 만들었다. 필름의 성질을 활용한 실험 영상인 전작이 다소 난해했다면 <그곳, 날씨는>은 편하게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원우 감독은 “전작 <옵티그래프>로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면 이번 영화는 그보다 다섯 발자국 뒤로 물러난 이야기”라고 정확하게 안내했다.

영화 속 숲속은 미국 볼티모어 맨끝에 위치한 이원우 감독의 집 안방 창밖 풍경이다. “볼티모어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집 안에서 놀던 아이가 밖에서 날아온 총에 맞고 숨지거나 길 가던 임신부가 다른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강력범죄, 마약, 총이 난무하는 곳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이렌이 울리고, 경찰차와 헬기가 많다.” 매일 긴장하고 살아야 하는 그곳 생활은 이방인에게 쉽지 않았다. 우울해하고, 힘들어하며, 한국을 한순간도 잊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그는 SNS나 유튜브를 통해 늘 한국 소식을 접했다. “시차 때문에 미국이 아침이면, 한국은 밤이었다. 이처럼 시간이 늘 뒤섞인 일상이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많이 그리워했다. “미국에는 스몰 토크라는 게 있다. 낯선 사람들과 주고받는 대화인데 날씨 얘기를 주로 나누다보니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친구들과 연락할 때도 마찬가지다. 서울 날씨는 어떠냐고 물어볼 뿐이지 미국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얘기하기 힘들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그의 일기이자 편지인지도 모른다.

집 밖에 보이는 울창한 숲은 아름답고 새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숲속을 바라보는 일이 그에게 있어 미국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첫해 겨울, 눈이 내리던 날 동물의 발자국을 보고 카메라로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CCTV 같은 카메라로 찍으려다가 타임랩스로 찍었다. 물리적인 시간이 다르다보니 생각보다 영상이 길게 찍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뒤섞인 시간을 확인하는 재미가 새로웠다.”

울창한 숲과 포개진 영상들은 한국에서 찍은 것들이다. 평소 계획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습관처럼 찍은 영상들이다. 친구들이 서독제에 와서 사진 찍고 영화 보고, 쌍용자동차 파업 연대 집회 시위도 하며, 자취방에서 치킨 먹으며 파티하는 등 다양한 일상들이 펼쳐진다. “한국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볼티모어에서 아무리 신기한 풍경을 보아도 서울이, 한국이 그리웠다”는게 이원우 감독의 설명이다. 그렇게 미국과 한국에서 찍은 영상들을 육아하는 틈틈이 재구성했다. 어떤 평가를 받더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가 잔뜩 들어갔던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는 “모든 걸 내려놓고, 지금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화를 즐겁게 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그 점에서 <그곳, 날씨는>은 “초심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이 작용해 “(창작자로서) 리셋을 할 수 있었던 작업”이다.

이원우 감독은 4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최근 가족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로 이주했다. “돈을 벌기 시작한 남편의 직장 때문에 마닐라로 오게 됐다. 볼티모어가 그렇듯이 마닐라도 안전하지 않다. 트럼프로부터 벗어나 두테르테(필리핀 대통령)에게 가다니 이게 뭐지 싶다. (웃음)” 그의 다음 작품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말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동물을 좋아한다. 말도 좋아한다. 말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퇴화했다. 말이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 될 것 같다.” 필리핀이 그에게 또 어떤 영감을 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시놉시스

영화는 미국 볼티모어의 한 숲속 풍경과 서울에서 찍은 여러 일상이 겹쳐 전개된다. 타임랩스 기법으로 촬영된 숲속 영상은 물리적인 시간보다 더 빠르게 재생된다. 화면 하단에는 촬영 정보(카메라 종류, 촬영 일시)가 기록되어 있다. 숲속 풍경 위로 한국에서 찍은 여러 일상이 지나간다. 미국과 한국, 각기 다른 시공간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

●타임랩스 작업

타임랩스 방식으로 촬영한 까닭에 촬영 정보가 화면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그건 이원우 감독의 의도적인 계산에 따른 선택이다. “5월 15일과 11월 15일은 같은 장소라도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촬영 정보를 보여줌으로써 시간 변화를 관객에게 인지시키고 싶었다”는게 그의 의도이다. 또 영화는 시간이 중요한 매체다. “영화는 감독이 상황에 따라 시간을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는 매체다. 그처럼 타임랩스 또한 어떨 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또 어떨 때는 느리게 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랫동안 필름으로 작업한 그는 “필름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타임랩스 또한 그저 세워두고 계속 찍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필름과 공통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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