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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무늬의 방향
강화길(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EEWHA(일러스트레이터) 2020-05-25

소설 <그레이스>

나는 영화감독 사라 폴리가 어린 시절에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일화를 매우 좋아한다. 소설 <그레이스>의 판권을 사고 싶다는 그 당찬 포부가 단박에 거절당했다는 결말까지도. 17살의 소녀를 사로잡은 <그레이스>는 캐나다의 실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이 실화는 알면 알수록 매우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실제로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사건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고, <그레이스>를 쓰기 전 이미 드라마 극본 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무슨 사건이었길래 이 영민한 여성들을 모두 사로잡은 것일까.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치정 살인사건이었다. 1843년, 그레이스 마크스는 살인사건으로 체포된다. 그녀가 일하던 집의 주인 토마스 키니어와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한 혐의였다. 이때 낸시는 임신 중이었다. 그레이스에게는 제임스 맥더모트라는 공범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사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때 그레이스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이 사실이 캐나다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재판 결과 제임스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레이스는 종신형을 받았다가 1872년에 사면받았다. 그 이후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것이다. ‘그레이스 마크스’에 대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그녀가 제임스 맥더모트의 연인이 맞는지, 아니면 협박을 받은 건지, 무엇보다 왜 살인을 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누구도 끝내 알지 못했다. 대신 “말”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 시끌벅적 많고도 많았다. 이에 대해 소설 속 그레이스 마크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구절이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정신과의사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에 대해 이렇게 판단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우며, 여느 하인들보다 교양 있다네.”

그 순간 나는 전혀 어렵지 않게,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유명한 신조어를 만들어낸 이 글은 여성들을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고, 그녀들의 말을 가로막는 일부 남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날카로운 통찰은 여성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발언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탓에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자라나는 일부터, 강간을 당해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전문적인 식견으로 알카에다에 대해 경고를 했으나 무시당한 사건들까지 확장된다(9·11 사태에 대한 경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글은 여성들의 침묵을 강요하는 남성들의 태도를 꼬집고, 그걸 용인하는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있지만, 오직 분노하기 위해서만 쓰여진 것은 아니다. 레베카 솔닛은 자신 역시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결국 목소리를 갖게 되었고, 다른 여성들도 이 욕구를 꺾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를 읽으며 레베카 솔닛을 떠올린 이유는 바로 조던 박사의 평가를 끌어낸 그레이스의 “말”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 실제 역사에서 그레이스 마크스의 목소리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레이스는 사람들 앞에서 거의 입을 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저 기록되지 않았던 것뿐 아닐까. 마거릿 애트우드가 창조해낸 그레이스 마크스는 생각보다 꽤 수다스럽다.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와 “교양 있는 말투”로 조던 박사가 “발견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여자”의 이야기를 한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가 무를 선물하는 정성을 보였으니 나도 보답 차원에서 기꺼이 내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이런저런 일들을 충분히 곁들여 최대한 재미있게 꾸밀 생각이다. 나는 주는 대로 받는다는 말을 믿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 소설의 초반부, 베널링 박사가 조던에게 그레이스를 ‘세이렌’ 이라 칭하며 밀랍으로 귀를 막으라고 조언한 것이 옳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세이렌’의 ‘말’이 그저 남자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레베카 솔닛의 글에 등장하는 남자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소설 속 그레이스는 세이렌처럼 정말로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조던에게 계속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 첫 번째로 사귄 친구, 하녀로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가는 마음, 분노와 슬픔, 증오와 행복에 대해서.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조던이 원하는 환자–여성의 모습을 위해 조작된‘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조던은 그녀에 대해 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혀 모른다. 그것은 독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레이스가 허구와 진실을 뒤섞고 있다는 것만 알 뿐 나머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를테면 그녀는 살인범인가? 이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대체 그레이스 마크스는 누구인가? 이 질문들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 모습은 <오디세이아>에 등장한 다른 에피소드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페넬로페의 이야기다.

구혼을 거절하고자 하는 자신의 언어를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 그녀는 어떤 선택을 했던가. 옷 한벌을 만들면 구혼을 받아들이겠다는 핑계를 댔다. 낮에는 베를 짜서 옷을 만들고, 밤에는 실을 풀어버렸다. 그것은 남자들이 무시하는 가운데서 끈질기게 지속된 강경하고도 분명한 거절의 언어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말을 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레이스의 이야기 역시 일종의 방법처럼 보인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감추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단어들을 앞세운다. 어떤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한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그레이스 역시 계속 바느질을 하지 않았던가.

사라 폴리의 일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결국 <그레이스>의 판권을 샀기 때문이다. 그저 귀엽기만 했던 아역배우는 자라서 영화감독이 되었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하기위해 애쓰는 하녀의 이야기를 선택한다. 드라마로 만든다. 여기서도 그레이스는 같은 질문을 한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소설은 그에 대한 길고 긴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내 이야기는 내가 하겠다는,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계속 바느질을 해나가며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늬를 조금 바꾸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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