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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실패가 너무 가까이에
정소연(SF 작가) 2020-12-16

동료 작가가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 감염경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동료 변호사의 법무법인에 밀접 접촉자가 발생했다. 의뢰인과의 식사 자리를 거절할 수 없어 나갔는데 그 자리에 확진자가 있었단다. 법인 직원 전원이 진단검사를 받고 법인 일시 폐쇄까지도 고려하고 있다.

내 사무실은 여의도에 있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내 사무실이 입주한 빌딩에도 공실이 늘어나고 있다. 우편물이 쌓인 우편함, 한산한 엘리베이터. 우리 건물은 고통 분담을 위해 관리소장직을 무급으로 전환해 효율적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공지가 붙었다. 집합건물 관리소장은 보통 소방법 등에서 정한 자격이 있고 기간제법 예외사유에 해당해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 고령노동자다. 아마 고용유지조건으로 무급에 동의했을 것이다. 관리소장이 무급이 되며 관리비가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임대료는 (당연히) 조금도 삭감되지 않았다. 어쩌다 다른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타면 십중팔구 주식이나 부동산 이야기를 듣는다. 주식 투자니 트레이딩이니 하는 간판을 붙인 회사들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국선 사건은 본래 생계가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다. 국선선정조건에 일정액 미만 소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업란에 무직, 자영업, 일용노동자, 주부라고 쓰여 있거나 기초생활수급자나 의료보호 대상자라고 표시된 사건을 배정받으면 전화로 생사와 생계 사정부터 확인한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연락이 닿아도 긴급생계자금대출이 바닥난 피고인부터 코로나19 확진 후 몸이 아파 생계활동이 불가능하다는 피고인까지, 사정이 좋은 이가 한명도 없다. 하루 한 시간 청소해 만원을 번다. 공사 현장까지 자비를 들여 갔다가 열이 37.5도 이상인 인부가 있어 공치고 돌아오는 날이 되풀이된다. 손님이 한명도 없는 가게를 친정엄마와 억지로 계속 연다.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 차라리 징역형을 받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노동 사건 상담에는 비슷한 질문이 쌓인다. 매출 감소로 인한 사직, 감원으로 인한 근무시간 연장, 계약갱신 거절, 근로조건 악화…. 자영업 사정은 말도 하지 못할 지경이다. 모든 직원이 자발적으로 무급휴직에 동의해 4대 보험을 직장가입으로 유지하고 휴업급여를 받아도, 임대료 등 기본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폐업하는 업장이 늘어나고 있다. 사장에게 돈이 없을 리 없다고 진정이 제기되었는데 조사해 보면 정말 돈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예 노사갈등조차 없는 업장도 있다. 어떻게 구제해 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올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더라도 코로나19에 감염되지만 않아도 성공이라는 말이 들린다. 그러나 그 성공은 지극히 계급적이다. 더 위험한 사람들이 있고, 더 위험한 사람들은 올해 내내 점점 더 위험한 처지로 몰렸다. 소득이 없으면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거나 부업을 하는 과정에서 위험 노출 빈도가 늘어난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겨우 구해 새로 진입했다가 일이 손에 익지 않아 바로 사고를 당하고 산재 신청을 알아보는 처지에 놓인다. 어디를 털어도 돈이 없다.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매한가지라는 말을 진심으로들 한다. 생사를 가르는 실패가 너무 가까이, 너무나 가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