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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이건 외계인의 짓이에요
이경희(SF 작가) 2021-06-03

어릴 적 나는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아이였다. 흐릿한 컬러 사진이 여러 장 들어간 검정 표지의 음모론 책들을 잔뜩 읽으며 그 믿음은 점점 공고해졌다. 나는 서울 상공에서 UFO와 교전이 벌어졌다는 에피소드를 실제처럼 굳게 믿었고, UFO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능에 화상을 입은 농부의 사진을 보며 공포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외계인이 침공하는 줄거리의 영화를 보는 게 무섭다. 특히 <싸인>과 <클로버필드 10번지>를 극장에서 볼 땐 정말 세상이 끝날 것처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아마도 이런 공포의 원인은 전부 <엑스파일> 때문이리라. FBI 특수요원 폭스 멀더와 데이나 스컬리가 매주 초자연현상을 수사하는 이 TV 시리즈는 내가 아직 꼬꼬마 초등학생이었던 94년에 국내 방영을 시작해 10대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까지 이어졌다(실은 그 이후로도 극장 영화 한편과 드라마 두 시즌이 추가로 방영되었는데… 음… 그냥 없었던 일로 쳐도 되지 않을까?).

엑스파일

이 시리즈의 골수팬이었던 나는 매주 월요일 밤 KBS에서 <엑스파일>이 방영될 때마다 어김없이 TV 앞에 앉아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수험 공부라도 하는 심정으로 일주일 내내 테이프를 돌려보고 또 돌려보곤 했다. 당대의 외계인 음모론과 초자연현상이 전부 진짜라고 믿었던 내게 <엑스파일>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나 다름없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최첨단(?) 오컬트 지식을 뽐내는 멀더와 그런 멀더를 매번 위기에서 구출하는 스컬리의 멋짐에 흠뻑 빠져든 기억도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 주인공 스컬리의 인기는 굉장했는데, 과학자이자 FBI 수사관인 이 캐릭터의 영향으로 이공계에 지원한 여성이 크게 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꽤나 이슈가 된 작품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마음대로 얹곤 했다. <엑스파일>은 원래 그래. <엑스파일>은 이래서 별로야. 사람들 사이에 차곡 차곡 쌓여가는 오해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엑스파일>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이 시리즈가 모호한 줄거리에 분위기만 잔뜩 잡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죽인 게 귀신인지 외계인인지,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잘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주장.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결론이 명확했다. 시청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까봐 결말에서 친절하게 스컬리가 작성한 보고서를 읽어줄 정도로. 아마도 이런 오해가 양산된 이유는 이 드라마가 심야에 방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꽤 많은 시청자들이 결말까지 시청하지 못하고 도중에 잠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오해로는 <엑스파일>이 공포 드라마라는 것이다. 물론 호러 에피소드가 상대적으로 많기는 하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코미디부터 로맨스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다. 어떤 에피소드는 깔깔거리는 패러디로 가득 차 있고, 어떤 에피소드는 서늘할 정도의 첩보 스릴러로 변하기도 한다. 당대 미국 TV드라마의 모든 장르 요소가 활용된 총집편이랄까. 생각보다 무섭지 않으니 용기 내어 많은 분들이 찾아보셨으면 좋겠다. 지금은 아마존 프라임에서 언제든 감상할 수 있다.

시즌9 동안 200편 가까운 에피소드가 방영된 장수 시리즈이다보니 새로 감상을 시작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분도 계실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나의 최애 에피소드 베스트5를 한번 소개해볼까 한다. 물론 외계인 음모론과 관련된 중심 에피소드는 소개에서 제외했다. 그건 전부 다 재미있으니까(실은 다시 찾아보기 쪼끔 무섭다).

시즌2 19화 ‘구축함의 비밀’은 해군 구축함의 승무원들이 어느 날 모두 폭삭 늙은 채로 발견되며 시작한다.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구축함으로 파견된 멀더와 스컬리에게도 동일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급속도로 나이를 먹으며 이른 최후를 준비하게 된다. 특별한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에피소드인데, 작중에서 언급되는 북유럽 설화가 좋았다. 종말에 관한 이야기로, 천천히 쌓여가는 하얀 눈에 의해 모든 세상이 덮이고 빛을 잃은 세계는 영원한 어둠에 조용히 잠기게 된다는 내용.

시즌3 12화 ‘외계에서 온 불청객’은 살인 바퀴벌레 떼가 시골 마을 주민을 살해하는 사건이다. 사건 소식을 접한 멀더와 스컬리는 반신반의하며 이 벌레들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곧이어 끔찍한 벌레 떼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 벌레들은 사실…(스포일러). 이 에피소드의 압권은 이야기 절반 즈음에 삽입된 짓궂은 장난질이다. 시청자가 한창 줄거리에 몰입할 즈음, 화면 위로 시커먼 바퀴벌레 한 마리가 휙 지나가는 것이다. 진짜로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난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평소와 달리 멀더의 독백으로 끝나는 유머러스한 결말도 정말 좋다.

시즌3 20화 ‘호세의 소설’은 호세 청이라는 사람이 스컬리를 인터뷰하며 외계인 납치에 대한 ‘소설을 쓴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이라는 게 어쩐지 좀 수상하고, 갑자기 형광 쫄쫄이를 입은 외계인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인형 옷처럼 지퍼가 달린 가짜 외계인의 부검 테이프가 등장하더니, 멀더가 정부의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데다 꽥 하고 이상한 비명을 지르질 않나…. 아무튼 스토리는 점입가경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엑스파일>을 스스로 비틀어 패러디하는 개그 에피소드로, 전체 시즌 중에서 가장 배를 잡고 웃었던 회차였다.

시즌6 2화 ‘악마의 질주’에서는 특수한 전파를 내뿜는 해군의 비밀 실험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부작용이 생긴다. 서쪽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죽게 되는 것. 멀더는 마지막 생존자를 차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고, 스컬리는 해군을 찾아가 진상을 규명하고자 한다. 스컬리가 치료법을 찾느라 분투하는 동안 멀더의 자동차는 달리고 또 달려 이윽고 육지가 끝나는 지점까지 도달하는데…. 영화 <스피드>에서 여러모로 영감을 받은 듯한 에피소드로, 어릴 적 본방으로 시청했을 때 살 떨리게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시즌6 3화 ‘버뮤다 삼각지대’는 이제는 완전히 죽은 떡밥인 ‘버뮤다 삼각지대’ 이야기다. 카리브해 버뮤다제도 인근의 삼각형 공간을 지나던 배들이 종종 사라졌고, 한참 미래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괴담이 모티브. 이 에피소드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라졌던 나치의 배가 다시 나타나고 멀더가 그 배에 오르게 된다. 어찌된 영문인지 멀더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언제나 그렇듯 스컬리가 한 박자 늦게 멀더를 뒤쫓아오면서 둘은 엇갈리게 된다. 멀더와 스컬리는 같은 배의 같은 공간을 거닐지만 서로를 발견할 수 없다. 멀더는 과거에 있고 스컬리는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대에서 행동하는 장면들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편집이 압권이다.

음, 그런데 분명 처음엔 <스타트렉> 이야기를 할 작정이었는데, 어쩌다 <엑스파일> 이야기로 빠져버리게 된 건지. 이건 외계인의 짓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