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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종'에 부재한 재현의 윤리와 공포영화로서의 한계

과잉이 아닌 과소(寡少)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랑종>은 올해 상반기 최고 기대작 중 하나였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혼란한 주제로 관객을 출구 없는 미로에 빠트리며 극한의 공포를 선사했던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제작한 영화로 원안이 <곡성>의 프리퀄이라는 정보가 알려지면서 이미 흥행은 보증된 것처럼 여겨졌다. <셔터>와 <샴>으로 태국 공포영화를 전세계에 알린 반종 피산다나쿤이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 또한 한국·태국 합작이라는 새로운 화학작용에 관심을 높이며 기대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최종적으로 공개된 트레일러는 그 기대를 거의 믿음과 확신으로 전환시켰다. 트레일러는 영화 초반부에서 차용하고 있는 민족지적 다큐멘터리의 사실적인 양식을 전유하고 태국 북부 이산 지방의 정글과 동굴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며, 태국의 무당인 ‘랑종’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으스스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개봉된 영화는 그 믿음을 배신했다. 홍보사가 제공한 정보가 틀린 것은 아니나 정말로 그것이 다였다. <랑종>에는 나홍진 감독이 전작에서 시도했던 ‘믿음’에 대한 주제의식 그리고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 특유의 젊은 여자의 비틀린 신체가 주는 기이함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그 둘의 결합이 시너지를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서로의 장점을 깎아먹고 트레일러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 ‘과소’(寡少)의 결과를 가져왔다.

불쾌감을 일으키는 카메라

공포영화는 과잉의 장르다. 과잉은 경계를 무너트리고 흘러넘치며 위반을 가능하게 한다. 공포는 불쾌감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불쾌와 쾌락, 불안과 안전의 감각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공존해야 한다. 공포의 쾌락은 규범을 넘어서며 동요를 일으키고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감각에서 발생한다. 진부함과 새로움, 제정신과 광기, 의식과 무의식, 인간과 비인간, 이성과 비이성, 표면의 피부와 내부의 살덩이와 장기, 삶과 죽음의 노골적인 교란과 폭력은 주류 사회 이데올로기가 억압한 욕망을 폭로하고 정상성의 궤도에서 일탈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중성과 경계 넘기 덕분에 공포 장르는 그 자체로 불안정한 텍스트가 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 및 퀴어 영화비평가들은 공포영화를 즐겨 분석해왔다. 공포영화는 자주 아이, 여성, 성소수자, 소수인종, 외국인 등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신체들을 비정상성, 비이성, 비인간성을 투사한 괴물의 모습으로 형상화해왔다. 이들은 차별과 혐오의 사회적 편견에 의해 괴물화되지만, 괴물이 된 소수자의 신체들은 일탈적 힘을 이용해 역으로 규범적 재현 체계와 사회의 정상성 관념을 뒤흔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캐리>에서 10대 소녀 캐리가 생리혈을 은유하는 돼지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는 장면은, 10대 소녀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혐오를 반영한 차별적 재현인 동시에 억압된 캐리의 분노와 힘을 폭발시키는 해방적 순간으로 작동한다. <엑소시스트>에서 팔과 다리를 꺾어 뒤집어진 사족보행으로 계단을 내려오거나 십자가로 엄마 앞에서 자위를 하는 10대 소녀는 그 자체로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의 전시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금기시하는 종교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젊은 여성들의 신체는 이질적인 힘에 사로잡혀 있지만, 순순히 매개하는 빈 그릇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불쾌의 쾌락을 발생시키는 그 신체들은 어느 순간 여성을 억압하는 규범에 도전하는 힘을 가진 신체로 변신해 있다.

<랑종>은 바로 이 이중성과 경계 넘기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랑종>에서 악령에 빙의된 것으로 묘사되는 젊은 여성 밍(나릴야 군몽쿤켓)은 기존의 규범을 흔들지 않는다.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밍은 오히려 영화 내내 자신의 신내림을 기록하겠다고 하는 다큐멘터리팀의 카메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무력하게 느껴질 정도다. 카메라의 프레임이 밍을 가두는 프레임이 된다.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를 차용해 다큐멘터리팀이 무당(랑종)인 님(싸와니 우툼마)과 그녀의 조카 밍을 기록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다큐멘터리팀은 지속적으로 밍을 촬영할 이유를 만든다. 여기서 오히려 밍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은 카메라 뒤의 다큐멘터리팀처럼 보인다. 갑작스럽게 생리혈을 흘리는 장면에서 밍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다. 그럼에도 다큐멘터리팀은 화장실로 뛰어가 급하게 피를 닦는 밍을 화장실 문틈 사이로 집요하게 촬영하며, 생리혈을 기이함으로 전시하고 빙의의 증거로 내민다. 낯선 남자들과 빈 사무실에서 섹스하는 밍을 촬영한 CCTV 영상은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밍의 상사를 통해 동의 없이 공유된다.

여기서 불쾌감을 일으키는 것은 밍의 생리혈과 섹스가 아니라 다큐멘터리팀의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촬영방식이다.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대상이자 무당처럼 공포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해야 할 다큐멘터리팀이 신뢰를 잃자, 영화의 틀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팀은 밍의 폭력성과 기행이 가족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게 되면서 집 안에 CCTV를 설치하고 밍의 모습을 촬영할 명분을 애써 만들지만, 그저 밍의 폭력적인 행동을 전시하기 위한 설정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밍의 폭력이 일차적으로 동물이나 아기 같은 약자들에게 향하는지, 왜 야산티아 가문의 악행의 업보를 밍이 받아야 하는지도 적절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더 문제는 이 영화가 역사적 번역 과정이 필요한 우화의 알레고리, 관습적이고 물질화된 상징, 전염적이고 스타일화된 밈이 구분되지 않고 납작하게 섞여 어떤 의미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전파성과 스타일의 동학으로 움직이는 ‘밈’화의 가속만이 남는다. 영화보다 트레일러가 더 무섭고 흥미로운 결과물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의미와 서사보다 정보로서의 ‘밈’이 더 우선이고 중요해진 시대에 어쩌면 <랑종>의 트레일러야말로 동시대 영화의 징후일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믿음, 버려진 관객

‘믿음의 불가능성’이라는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곡성> 또한 알레고리, 상징, 밈이 구분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양상을 과잉되게 밀어붙여 현대사회의 징후로 해석 가능하게 한다. <곡성>은 무수한 정보가 속도전을 방불케 하며 쏟아지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읽어낼 수 없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대적 관점만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할 수 있는 일은 모호하고 애매한 정보들을 갖고 사적인 음모론 서사를 쓰거나 경쟁하는 세계관 중 ‘특정 세계관’을 선택해 그 관점과 설정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뿐이다.

즉 관객/종구는 무명, 일광, 외지인 중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서사를 갖게 된다. 무당은 각자의 세계관으로 이끄는 매개자이다. 여기에는 어떤 절대적 믿음도, 근거도, 해결도 없다. 그저 각기 다른 세계에의 선택과 참여만이 있을 뿐이다. 이럴 때 그 선택지를 제시하고 결정한 창작자의 권위만 커진다. 사실 이 영화는 다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의미의 무의미를 역설하며 참여를 독려하는 창작자를 믿는 유일신에 근거해 있다.

<랑종> 역시 <곡성>과 유사한 주제와 구도를 따르지만 이 영화에는 경쟁하는 세계관이 부재한다. <랑종>에도 님을 비롯해 다른 무당들이 등장하지만 <곡성>의 무당들처럼 자기만의 세계와 캐릭터를 구축할 여지를 주지 않고 최소화한다. 믿을 만한 무당이었던 님마저 충격과 반전의 장치를 위해 무력하게 죽고 만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팀이라는 무당과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하나의 세계관만이 남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밍에 대한 착취적 시선으로 인해 설정이 너무 일찍 무너진다. 그렇게 영화는 믿음을 잃고, 관객은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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