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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약자에게 다행한 삶은 없다
정소연(SF 작가) 2021-08-19

차별적인 세상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지식노동을 하는 여성이다. 일터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업무의 내용만 따지면, 사람들의 성별이 중요한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성차별적이다 보니, 즉 성별에 따른 발언권의 차이가 크고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양식과 발화습관이 현저히 다르다 보니, 주장과 설득이 주요 업무인 내 분야에서 ‘일이 되게’ 하려면 성별을 신경 써야 한다. 남성들이 더 많이 말하고, 남의 말을 더 많이 끊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그럼에도 의사 결정권자 중 남성의 비율이 더 높다는 차별적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여 고려하는 과정이 업무에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저 많은 말 중 어떤 말이 발언권의 확인에 불과한지, 어떤 말이 실제로 유의미한지를 따진다. 내게 발언자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 여성이라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위축되어 있는 게 아닌지 살펴 발언의 기회를 배분한다. 나에게 의사 결정권이 없는 일에서 바라는 결과가 있다면, 내 주장이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할 만큼 치밀하고 탄탄한지 점검하는 동시에 ‘사나운 여자’, ‘고집 센 여자’, ‘똑 부러지게 일하는 여자’ 같은 여성상 중 나의 태도 내지 이미지를 선택해야 한다. 내 주장이 타당하고 내 근거가 견실하면 내가 어떤 태도로 말하든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이상만으로 일했다가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위험이 있다.

나는 기혼이다. 소위 ‘정상가족’ 신화가 강하고 이성애 전제가 뚜렷한 이 차별적인 사회에서, 기혼인 나는 어떤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아플 때 보호자를 구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가구 단위인 경제·복지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릴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혼인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다음 까다롭거나 무능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더 사적인 질문을 받을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정상가족상과 그에 벗어난 경우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이상, 아무래도 기혼보다는 비혼이 혼인 여부를 더 많이 신경 쓰고 자신을 더 자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면 쉽게 인지한다. 반면 비혼인들이 차별받으면 이를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다. 나는 비장애인이다. 아마 나 자신이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 적이 꽤 많이 있을 것이다. 차별적인 현실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운신의 폭을 확보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다. 차별은 언제나 약자에게 확실하게, 조금도 헷갈릴 일 없게 가혹하다.

이 가혹함을 때로는 약자로서 경험하고 때로는 옆에서 지켜본다. 아무리 역지사지니 연대니 해도, 내가 경험하는 것과 내가 ‘피한 상황’을 보는 것은 결코 같지 않고 차별이 심할수록 이 두 경우 사이의 차이는 커진다. 이 차이도 고통스럽다. 가끔은, 아니 자주, 아득하다. 차별적인 세상에서 여러 층위의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 숨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