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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말의 어려움, 어려운 마음
정소연(SF 작가) 2021-11-04

“이렇게 성과가 낮은 직원을 계속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 와서 나름 열심히 했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열심히 해도 성과가 나지 않는 직원에게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은 불공정합니다.”

회사측 대리인이 열변을 토한다. 얄밉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렇게까지 말할 일인가 싶다. 얄밉다고 말할 수는 없어 반대편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딱히 쓸모도 없는 소심한 항의다.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법리적으로만 보면 당신들이 이길 사건이잖아요? 꼭 이래야 해요?’라고 생각한다.

질 사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전문가로서 승패를 가늠하지 못하고 희망찬 가정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는 일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가능성을 따져보고, 안될 일은 안될 일이라는 판단을 정확하게 하고,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출구 전략도 궁리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법리적, 현실적, 전략적.

허용, 인과관계, 취지, 예비적, 여지, 혜량.

변호사 10년차. 이런 말을 칭칭 두른 채 살아간다.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정규직 전환 갱신기대권이 있다는 취지의 주장입니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부터는 “안될 일”이라는 말조차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 “노력을 기울여도 그만한 성과를 얻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점점 더 자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든가 “입증된 사실만을 따져보면 달리 판단하기 어렵다”든가 “수업료 낸 셈 치고 이 돈이라도 받는 편이 낫다” 같은 말을 한다. 이런 미적지근한 말들이 가득 들어찬 주머니를 신줏단지처럼 이고 지고 다닌다.

투쟁의 언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것은 직업적 숙련일까, 도피성 수사일까?

그 확신하던 마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것은 성숙일까, 안주일까?

어쩌면 나는 이제 더이상 구호를 외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뭐 저런 말을’ 싶은 소리를 듣고도 정의롭지 못한 말이라며 싸우지 않고 고개나 반대편으로 까닥거리면서. “이거라도 얼른 받자”라는 말을 하면서. 이 변화가 어색하지도 싫지도 않아 가끔 두렵다. 모든 사람들이 선봉에 서서 확신을 갖고 앞으로 직진할 수는 없다. 내 자리는 거기가 아니라고도 줄곧 생각해왔다. 가운데보다 반보 앞이 언제나 목표한 위치였다. 그러나 종일 주머니에서 늘 하던 말을 꺼내 쓰고 쓰고 쓰고 쓰다가 돌아온 날 밤이면, 역시 문득 의심하게 된다. 나는 지금 가운데에서 반보 앞이 아니라 반보 뒤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편한 대로 마음껏 물러난 것은 아닐까. 내가 가지고 다니는 이 커다란 주머니를 열어보면 그 안에는 내가 보낸 시간도 내가 쌓은 전문성도 내가 한 노력도 아 닌, 그저 열심히 모은 변명의 언어만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