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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 탈인간 중심의 서사를 위한 안내서
김성찬 2021-12-22

<티탄>의 철학적 주제에 대한 고찰

감독은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철학적 주제들, 이를테면 신유물론이나 사변적 실재론 등에 감화된 듯한 인상이 짙다. <티탄>의 등장은 이른바 ‘인류세’를 자각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려는 영화적 노력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지난 비평(<씨네21> 1317호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에서 나는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작품 두편, <주니어>와 <로우>를 경유하여 <티탄>을 점쳐본 일이 있다. 뒤쿠르노의 세계는 심화하는 자폐의 공간이며 여성인 주인공과, 조력자 또는 조련사로서 남성의 관계 양상이 <티탄>에서 어떤 식으로 다시 그려지고 규정될지 기대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후 국내 개봉한 <티탄>을 보니 뒤쿠르노의 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심화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무엇보다 새롭게 눈에 들어왔던 건 전작들에서 발견하기 힘들었던 철학적 주제 두 가지가 도드라졌다는 점이다.

젠더 유동성-성차/페미니즘의 관념론을 넘어

먼저 지난 비평에 대입해 이번 작품에서 남성인 조련사 또는 조력자로서의 존재 양태를 살펴보자면, 지난 두 작품에 비견되는 인물은 뱅상(뱅상 랭동)이라 할 만하다. 소방 지휘관인 그는 실종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그에게 여성인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실종된 아들로 오인돼 보호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뒤쿠르노 세계의 남성상이 뱅상에게만 투영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종된 아들이기도 하며 알렉시아가 남장한 인물인 아드리앵은 비록 가장된 상태이긴 하나 뱅상의 보호와 집착을 이끌어내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여성인 알렉시아를 도와주는 남성 조력자에 해당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전 작품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일한 이름과 배우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배치하는 일을 즐겼던 뒤쿠르노의 또 다른 놀이의 방식으로 보인다. 다만 이번에는 성차를 인지하기 전 시선에 와닿는 물질인, 바탕으로서의 인체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이리저리 흘려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동하는 젠더를 더욱 강조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분법의 성별은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되는 것과 동시에 물질로서의 신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이 관통하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점은 알렉시아의 행보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꼼꼼히 살펴보면 젠더 유동성을 기호화하는 이미지들은 영화 구석구석에 깨알같이 들어가 있다. 하나의 예는 알렉시아가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모처에서 살인 행각을 벌일 때 때마침 눈앞에 나타나 의도치 않은 희생자가 된 남성의 경우다. 이 남성은 신체상 전체적으로는 남성이지만 그의 가슴은 여성의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자웅동체의 형상인데 별다른 의도 없이 등장시킨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남성의 형상을 포함해 감독은 기계인간을 잉태한 알렉시아의 몸에서 벌어지는 변화, 남장했을 때의 알렉시아의 모습 등을 물성이 느껴지게끔 시각화해 보여준다. 특히 성차를 물질의 유동적 면모로 표현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관념적으로 여성을 기호화하는 대표적 이미지는 모유일 텐데, <티탄>은 모유의 원류를 기계적 메커니즘의 원천이 되는 기름으로 바꿔 내세움으로써 관념으로 성립된 여성상을 지극히 물질적인 이미지로 대체해 보여준다. 사실 몇해 전부터 불어온 페미니즘 바람이란 관념에 국한돼 있다고 할 만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페미니즘은 여성을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여성의 지위를 한곳에만 고정해왔던 남성 중심적인 정신 활동을 상대로 한 정신적 대항이며, 지향하는 방향도 이러한 대결을 넘어선, 정신에 근거한 모종의 지점을 향해왔다. <티탄>은 정신적 활동으로서 페미니즘의 성격을 물질로 바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질을 본질로 한 시각적 충격을 제시해 관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또는 성차에 근거한 정신적 대결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제스처라고 말해도 좋다.

기계와 신체의 결합 - 탈인간 중심의 물질주의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확장된 감독의 세계에는 기계의 출현과 신체와의 결합이 있다. 특이한 점은 <티탄>에서 보이는 기계들은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물질에 대한 경외인가 아니면 관념에 대한 강조인가. 감독은 기계와 인간의 DNA가 융합돼 발생한 태아를 제시하면서 관념과 물질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무언가로 관심을 유도하는 듯하다.

신유물론적 담론을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사유와 그의 유물을 재해석해온 이들이 물질을 대하는 태도는 르네상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인본주의적이다. 노동을 창출하는 인간의 신체가 중요한 제재로 여겨진 데서 알 수 있듯이 물질로서 인간에 천착하는 존재론인 셈이다. 또 포스트 마르크스 철학 세계에서 인본주의적 면을 잘 찾아볼 수 있는 건 현상학일 테다. 이 또한 과격하게 요약하면 인간 신체에서 발현하는 감각의 영향들에 기초한 물질적 사변을 드러낸다. <티탄>은 이러한 사고의 안티테제다. 감독이 보여주는 기계와 신체의 결합은 관객의 기분을 더럽히기 위한 악취미가 아니라 그간 인간 주변에서 피동적인 상태로서만 사유의 대상이 되었던 물질을 기계로 표상한 뒤 자발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 바깥을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감독의 태도를 반-인간이나 친-기계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는 물질주의는 어떻게 영상화될 수 있고, 스크린에 반영될 수 있는지에 관한 감독의 무의식이 투영된 결과로 보인다. 또 이 점은 관객이 쉬이 받아들일 만한 이미지 또는 논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탈인간화를 지향하는 사유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알렉시아가 경험하는 고통과 진통은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은유라 할 법하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는 일, 즉 세계관을 깨부수는 일은 산통을 겪을 정도로 힘에 부친다. 출산 직후 알렉시아가 죽은 것처럼 우리의 인식이 죽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탈인간 중심의 물질적 사고의 형상은 티타늄으로 직유된 갓난아이의 등뼈 이미지로 가시화한다.

인간을 구심점으로 하는 사상은 과거 신의 시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에 천시됐던 인간 본연의 중요성을 깨워준 공로는 있지만, 이제는 외려 인간 중심적 사고에 매몰돼 시야를 좁히는 현상을 낳았다. 세상은 인간으로만 이뤄지지 않은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니 인류의 존재가 세상을 위협할 뿐 아니라 인간 사이에도 계급 차, 성차, 세대 차, 빈부 격차 등에 따른 갈등과 같은 각종 병폐가 양산됐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물질에 자발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재평가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지 모른다. 돌아보면 줄리아 뒤쿠르노의 작품들은 플롯이나 서사보다 물성을 지닌 이미지 전시에 더 집중해왔다. 등장인물의 신체와 이 신체에서 벌어지는 변형의 세세한 광경, 훼손됨에 따라 떨어지는 살갗들과 피를 극접사한 이미지들은 물성이 진하게 배어 있다. 물질을 먼저 보여주고 변태(變態)(<주니어>), 식인(<로우>), 젠더 유동성과 탈인간(<티탄>)이라는 관념이 덧붙여진다. 이건 관념과 물질의 대립이라는 오래된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항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이를 종횡무진하면서 해체하려는 의지를 시각화한 사례라 할 것이다. 적어도 오로지 인간이라는 관념과, 인간이라는 물질에만 갇혀 있는 것보다는 더 낳은 상황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시네마틱 버전이 바로 <티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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