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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이> 성초이 작가, 구경이는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1-12-23

작가 성초이가 쓴 JTBC 드라마 <구경이>는 복잡하고 ‘의심스러운’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의 실제를 거침없는 태도로 발설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재학 시절부터 감독, 배우, 작가 등으로 종횡무진하며 창작의 영감을 수다 떨던 오랜 친구 두 사람이 메신저 채팅방. <구경이>는 두 작가가 지난 몇 년간 서로에게 방언을 쏟아내게 만들었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의 경험을 총합한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인간의 슬픔이, 성별에 근거한 온갖 범죄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고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한판을 하거나 모여서 피자 한판을 뜯음으로써 살아 있기로 하는 생의 끈질김이 있다.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이 삶의 유일한 기쁨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 송이경(김혜준)과 그를 잡으려는 중년의 히키코모리 탐정 구경이(이영애)의 긴 사투는 그런 부조리 위에서 춤추듯 흘러간다. 탐정 이영애와 살인마 김혜준이 진지하게 줄다리기만 해도 재밌을 서사이지만, 작가 성초이는 그 위에 한결 이상하고 애틋한 충동을, 억척스러운 유머를 뿌림으로써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팀워크의 묘미까지 극대화했다.

*성초이라는 정체성에 기반해 두 사람의 말을 합쳐 정리했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할 때는 임의로 각각 A와 B로 나누어 표기했다.

- <구경이>가 12월12일에 종방했다. 본방송을 사수할 때 함께 모여서 보는 편이었나.

= 각자 집에서 따로 봤다. 작업을 도와준 친구들이 모여있는 메신저 채팅방에서 실시간으로 문자를 하면서 봤다. 일종의 넷플 파티 같은 거랄까. 같이 수다 떨면서 본다.

- 종방 시청률 2.3%의 수치 이상으로 열렬한 반응과 지지를 얻었다.

= 우리가 보고 싶은 것들을 엄청나게 다 넣어서 만든 각본이다.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라면 재밌게 보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콘텐츠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는 <구경이>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즐겨주신 분들이 있어 감사하다. 시청자층이 좀 더 넓었으면 좋았겠지만…. (웃음)

- 구경이 캐릭터를 처음 떠올릴 때 어떤 과정이 있었나.

= 2017년쯤 우리 두 사람의 메신저 채팅방에서 처음 <구경이>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처음엔 50대 여성이 탐정 역할을 수행한다는 게 전부였다. 엄청나게 유능한데 히키코모리인, 아주 예민한 사람이라는 정도가 구경이 캐릭터의 첫 스케치였다. 2018년 즈음 이영애 배우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도 우리끼리 주고받았던 것 같다.

- 가수 이소라가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는 것이 반전 취미로 화제가 된 적 있다.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구경이 캐릭터를 구체화했다고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포인트에 매료됐었나.

= 외국 장르물을 보면 마약, 술에 찌들어 있는 괴짜 탐정들이 나오지 않나. 이런 캐릭터를 한국화한다면 어떤 요소들이 있을까 떠올려봤다. 과거에 삭발한 이소라씨가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손에 든 아이패드에 캔디크러쉬사가류의 모바일 게임을 띄워놓은 모습이 캡처되어 짤로 돌아다닌 적 있다. 어쩌면 그런 이미지가 한국화된 이상한 탐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더라. 이소라씨는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자꾸 자기 캐릭터를 죽인다면서 슬프다는 말도 한 적 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웠다.

- 2017년만 해도 아직 여성 서사가 부상하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던 때다. 창작자들의 갈증은 큰 한편, <구경이> 같은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분위기도 덜했을 텐데.

= 처음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주인공이 매력 없다”는 거였다.

- 세상에! (웃음)

= 그 시절 우리 사이엔 어떤 피로감이 공유되고 있기도 했다. 영화 시나리오 4~5편을 받아서 모니터링하는 일을 했는데, 모두 1신에서 5신 이내에 여자가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였다. 이 작품들에 큰 배우들이 붙어 몇억원짜리 영화로 제작되는 산업 분위기에 대한 극심한 피로와 회의감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런 장르물에 나오는 남자 사이코패스들은 왜 그리 하나같이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고 쓰인 건지! (웃음) 우리는 꼭 ‘해맑게’ 가자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고 말갛고 화사하게 웃는데 사람을 잘 죽이는 여자를 만들어보자고 그때 결심했다. 당시에 이런 문제의식을 많이들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4년 넘게 준비한 작품인 만큼 여성 서사를 읽어내는 업계의 안목과 취향이 계발되고 있다는 사실도 체감했겠다.

= 계속 퇴짜만 맞다가 키이스트에서 제작을 결정한 순간에 그랬다. 캐릭터가 재미있으니 ‘확실히 Go 한다’는 제작사의 피드백을 처음 들었다. 대표님이 당연히 남자 캐릭터일 줄 알았는데 여자여서 좋다는 말을 했다. 거기다 영애님이 구경이 역을 맡아주신대서 ‘대박!’ 하며 쾌재를 불렀다.

-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일상의 기술이 부족하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전문가 캐릭터는 장르물에서 주로 남성 역할로 풀이되어왔다. 젠더가 바뀌었을 뿐 캐릭터의 굵은 줄기는 여전한데도 새롭게 생기는 활력들이 대단하다. 달리 말하면 젠더의 차이가 낳는 디테일의 묘사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 애초에 우리에게 구경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발상이었기 때문에 주로 남자로 해석된 캐릭터를 여자로 바꾸어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에 대해선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구석이 있다. 물론 그런 의미 부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여성 서사로서 <구경이>의 과감함과 정확함이 놀랍기 때문에 자꾸만 그런 지점들을 읽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송이경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 살인마 아닌가. 자칫 삐끗하면 얼마든지 대상화될 수 있는 캐릭터다.

= ‘비릿함을 없애자!’는 구호가 있어서 가능했다. (웃음) 우리가 집중했던 포인트 중 하나는 이경이가 어떻게 웃느냐였는데, 진짜 속 없는 애처럼 ‘컹컹컹’ 웃기를 바랐다. 집필 당시에 조금이라도 무표정하면 욕먹는 여자 아이돌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썼다. 늘 상냥하게 애교 부리길 요구받는 젊은 여성이 앞에선 그 기대에 부응하면서 뒤에선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는 어떤 충돌. 거기서 무언가 해소되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앞에선 아이돌 뒤에선 살인마라는 컨셉조차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일종의 대상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 불법 카메라, 여성 혐오 범죄 등 몇 년 새 중대한 이슈가 된 우리 사회의 시급한 폭력들도 에피소드마다 녹여냈다.

= 떠오르는 사건들이 너무 많아 그냥 술술 튀어나왔다. 구체적인 특정 사건에 반응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인 분노가 동력이 됐다. 사실 작가가 화가 나 있으면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내 말 좀 들어보세요’ 하고 사랑을 품어야 하는데, 한동안 분노에 지배당한 사람처럼 그런 마음을 먹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구경이>는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답을 찾고 회복하기 위해 애쓴 과정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래서 구경이는 끝까지 정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라 정답을 향해 찾아가는 인물이다.

조사 B팀 못지않은 성초이로서의 팀워크

-‘ 성초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왔나. 역시 채팅창에서 탄생한 작명인가.

= 그렇다. (웃음) 엉망진창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온 작명이라 비화를 다 들려주긴 힘들다. 주변으로부터 좀 허술한 작명이라는 야유도 종종 듣는다.

- 가까운 동료 사이에서 공동 작업을 결심하기까지 서로를 움직인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 진지하게 서로 협업을 해볼까 계획했다기보다는 각자 영화 작업을 시도하는 과정에 지쳐 ‘아, 정말 영화 못 해 먹겠다!’ 싶은 마음이 통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학교에서 만나 오랫동안 텔레그램을 주고받으며 수다 떠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이상 드라마라도 한번 써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하다 보니 끝까지 써졌다. 뒤늦게 드라마 집필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된 한편, 함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공동 작업의 장점도 크게 느꼈다.

- 공동 작업의 묘가 궁금하다. 어떤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나.

= 어쩌다 보니 코로나19 시대에 최적화된 작업 방식에 일찌감치 적응한 편이다. 각자의 컴퓨터 화면에 구글 드라이브 문서를 하나 공유해놓고, 옆에 페이스타임을 켜서 대화를 한다. 얼굴 보며 대화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채팅도 하고 있고 텔레그램으로는 자료 링크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다. 이때 손은 구글 드라이브 문서에 글을 쓰고 있다. (웃음) 신마다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에 대해 대략 합의한 상황에서 홀수, 짝수 신으로 각본을 해체해 나눠 쓴 다음 마지막으로 교차 검증을 하는 식이다.

- 성초이라는 얼터 에고에 관한 두 사람의 합의점 같은 것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지도 궁금한데.

= 성초이라는 정체성으로 글을 쓸 때는 개인으로서 글을 쓸 때와 꽤나 다른 스탠스를 지향한다. 고집과 취향은 각자의 글에서 풀기로 했다. 성초이로서는 서로의 취향이 겹치는 부분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견이나 갈등이 잘 생기지 않는다. 우리 둘의 협의도 수월한 편이지만 감독님이 새롭게 제시한 것에 관해서도 수용과 수정이 빠르다.

- 조사 B팀 소속의 나제희 팀장을 연기한 곽선영, 오경수를 연기한 조현철 배우의 말을 들어보면 캐릭터의 전사와 레퍼런스 같은 것도 꼼꼼히 던져주었다고.

= 모든 캐릭터들의 전사를 일일이 따로 정리한 것은 아니고 매일 주거니 받거니 한 내용이 채팅창 안에 방만하게 흩뿌려져 있다. 곽선영 배우의 경우 준비할 때 캐릭터의 전사에 대한 자료를 원해서 나제희에 관해 특별히 따로 추려서 전달했다. 서로 계속 대화를 던지기 때문에 브레인스토밍을 모아둔 파일만 100장이 넘는다.

- 영상원 출신으로 연출적 감각을 지닌 작가들이어서인지 애초에 극본에서 콘티를 염두에 둔 설정들이 꽤 눈에 띈다. 장면 전환과 시각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전개들이 <구경이>의 활력 중 하나다.

= 그래서 대본을 읽기 힘들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TV 드라마 대본 같지 않다는 말들이 많았다. 연출 전공자들이니 아무래도 이야기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장면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일 것이다. 장면화의 아이디어를 대본에 써두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게임 화면이나 연극 무대 장치를 적극적으로 장면화한 것은 이정흠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다. 구경이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설정, 케이가 희곡에서 살인의 영감을 받는다는 설정으로부터 감독님이 확장시킨 컨셉이다. 정말 잘 해석해준 결과물들이다. 사실 연극 역시 최초에는 없었던 설정인데, 케이의 살인 방법을 생각하다가 도입했다. 성경, 소설 등에서 살인의 영감을 얻는 살인마들 스토리가 있잖나. 그래서 쓰면서 이게 괜찮은지, 뻔하지 않은지 고민도 했었는데 케이와 구경이가 자기 감정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특성과 잘 맞물리면서 깊이감이 생겼다. 운이 좋았지.

- 두 사람이 실제로 게임을 즐기나.

A 쟤가 한다, 난 안 하고. 그리고 쟤는 실제로 방도 잘 안 치운다. 영애님이 구경이 캐릭터는 저 친구한테서 온 것 같은데… 할 정도로.

B 아니야, 아니라고!

- 결과적으로는 게임과 연극적 요소들이 폭력적인 장면을 윤리적으로 소화하는 세련된 장치들이 되어주기도 했다.

= 우리 둘 다 신체 훼손, 슬래셔 같은 장르물을 좋아한다. 하지만 TV에서 보여질 때는 달라야 한다고 본다. 특히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설정이라면, 반드시 피해자가 당하는 것을 자세히 보여준 다음 가해자를 응징해야만 하는지 이전부터 의문을 가져온 편이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도구적 묘사들로부터 불쾌감을 느낀다. 그걸 보여주면 이입도 쉽고 ‘사이다’가 되겠지만 <구경이>는 애초에 피해자가 존재하는 폭력 혹은 피해자에 대한 폭력을 너무 손쉽게 묘사하는 일군의 한국 콘텐츠들에 대한 피로감으로부터 생겨난 아이디어라는 점을 스스로 되새겼다. 그것이 극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지켜나갈지에 대한 기준이 됐다. 어쩌면 그래서 시청률이 안 나왔으려나? (웃음)

- 건욱(이홍내)과 대호(박강섭) 커플 외에도 구경이와 송이경, 구경이와 나제희 사이에서 퀴어 코드를 발견하는 팬들의 해석이 2차 창작물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혹시 각본상에 더 많은 디테일이 있었는데 TV 방송으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잘려 나간 내용이 있나.

= 딱히 잘린 건 없다. 딱 표현하고자 했던 대로 나왔다. 각본에서는 성애적 코드가 거의 없는 편에 가까웠달까. 오히려 감독님께서 그런 뉘앙스를 미묘하게 살려내는 작업을 즐기신 것도 같다. 처음에 이경이와 이모(배해선)가 포옹하는 장면에선 우리 둘 다 놀랐다. “이모랑 저런 느낌으로 안는다고? 너무 친한데!” (웃음) 남자 배우들이 여럿 나오는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브로맨스가 언급되듯, 여자들끼리 밀도 있게 부대끼고 서로 센 감정을 내보이는 작품이다 보니 그런 텐션을 성애적 감정으로 치환하기 좋은 포인트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49 대 51의 마음으로”

- 배우 이영애가 스타로서 가진 우아한 이미지와 <친절한 금자씨>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키치한 매력이 모두 좋은 재료가 되었다. 전자는 파리가 꼬일 만큼 씻지 않는 구경이 캐릭터와 배우 사이에 요상한 간극을 만들고, 후자는 구경이 캐릭터의 비범함과 시너지를 낸다.

= 한마디로 ‘짱’이었다. 영애님이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설정들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고등학생 시절을 연기할 때의 모습 같은 것. 극 중 구경이가 위장수사를 할 때 그런 매력을 더 잘 살려보자 싶었다. 조금 과하게 써도 얼마든지 훌륭히 소화해주리란 믿음이 있었다. 가령 대학축제 중에 벌어진 몰카범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구경이가 대학생인 척 전화하는 장면은 배우의 자질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추가한 장면들이다.

- 송이경 캐릭터는 캐스팅 풀이 꽤 넓었을텐데 배우 김혜준은 일면 의외의 선택이고, 결과적으로 배우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놀라운 도약대가 되었다. 구경이에 결코 밀리지 않는 배짱과 여유, 매력이 빛났는데 작가 입장에서도 흡족한 순간이 많았겠다.

= “속 없이 웃는다”는 지문 한 줄이 쓰기에는 쉬워도 직접 그 웃음을 지어야 하는 배우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겠나. 케이는 무서워질라치면 귀여워보여야 하고 짠해질라치면 미워보여야 하는, 어쩌면 배우에게는 아주 난해한 역할이다. 김혜준 배우의 이전 작들을 쭉 보면서 기본기가 상당히 탄탄하다는 인상을 받아왔는데, 극을 다 본 지금은 ‘김혜준이 아니었다면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생각 뿐이다. 흔들다리에서 허성태를 내려다보는 김혜준 배우의 얼굴은 우리도 실시간으로 방송을 보면서 “헉!” 했다.

- 나제희 캐릭터도 재미있다. 성장 드라마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범한 삶을 살다가 표면적으로 가장 큰 사건, 사고에 휘말린 인물이다. 엔딩에서도 구경이가 나제희에게 “많이 변했다”고 한다.

= 쓰면서 가장 고생한 게 나제희 캐릭터다. 탈고를 하고도 ‘나제희 어떡하지’ 할 정도로. 저마다 개성이 센 인물들 사이에서 이 친구가 어떤 얼굴을 입어야 할지 작가인 우리에게도 감이 조금 부족했다. 곽선영 배우가 엄청난 집중력을 갖고 인물을 연구했고, 심지어 대본과 똑같은 대사인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레이어를 더한 부분이 많다. 나제희는 배우가 새로 쓴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곽선영 배우님께도 직접 말씀드렸다. “당신도 이 시나리오의 작가입니다”라고. (웃음)

- 배우 김해숙에게도 용국장 캐릭터는 드라마 필모그래피의 방점 중 하나가 될 만하다.

= 종방 후에 김해숙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너무 즐겁게 연기를 하셨다면서 이런저런 소감을 들려주셨는데, 개인적으로도 고무적인 순간이었다. 특히 케이의 폭탄을 맞은 이후 서울역에서 경찰서로 연행되는 신은 배우가 대본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경우다. 원래는 구경꾼들이 사이에서 혐의를 부정하며 발악하는, 약간은 찌질하게 퇴장하는 컨셉이었는데 김해숙 선생님이 용국장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경찰차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연기했다

- 케이는 감옥에 갇히고 용국장은 사회적 질타를 받는 등 엔딩에서 권선징악의 구도를 꽤나 심플하게 가져갔다.

= 애초에 구경이가 승리하는 엔딩에 관해서는 의심이 없었으므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갈 길로 간 것이라 본다. 사실 권선징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게, 용국장은 곧 다시 활동할 것이고 허성태도 다음 선거에 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지금쯤이면 이경이도 탈옥하지 않았을까? (웃음) 응징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 끝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산타(백성철)를 곁에 두기로 하는 구경이의 변화가 엔딩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는데.

= 시청자가 된 처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산타만이 극 중에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악의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면서 선의에 대해서는 의심한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산타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의심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우리에게도 질문거리였다. 그리고 똑똑한 구경이는 사실 남편의 자살에 얽힌 사실관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모르는 것은 남편이 무슨 마음,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진실을 캐고 싶어서 매달렸다가 나락에 다녀온 인물이 구경이이고, 엔딩에서 산타를 받아들이는 결정은 그래서 구경이의 발전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구경이가 산타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옆에 두기로 한 것이지.

- 구경이의 남편 장성우(최영준)의 죽음과 혐의에 관한 진실을 시청자들에게도 온전히 다 알려주지 않고 끝냈다. 갈무리 방식에 대해 여러 버전이 있었을 법한데 현재의 엔딩이 곧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듯 보인다.

= 엄청나게 끔찍한 범죄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몹쓸 짓을 한 인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을 내 삶에서 마음처럼 깨끗이 제거하고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 30대에 접어든 이후 우리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저 매번, 반복 속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고민하면서 49 대 51의 마음으로 살 뿐이다. 대본 리딩 때 장성우 선생님을 연기한 최영준 배우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장성우의 진실에 관해서는 작가인 우리 두 사람의 의견도 여전히 조금 다르다. 이경이가 왜 살인을 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다른데, 그 복잡함 자체가 당연하게 느껴진다. 장성우가 결백하다고 믿는 배우의 해석에 관여하지 않고 뜻대로 남겨둔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엔딩의 여러 국면 중 ‘어쩌면 이것이 진짜 엔딩이다’ 싶었던 것은 미애(최하윤)와 대호의 선택이었다. (불법 촬영물 유포의 피해자였던 미애는 송이경의 조력자였지만 자신을 “도와준 그 여자애가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경을 배신하고 구경이의 손을 잡는다. 대호는 끝까지 건욱의 옆에 남아 그를 지키기로 한다 - 편집자) 두 사람은 의심과 확신 사이의 흔들림 속에서 자기 양심과 진심에 따른 선택을 했고, 후과가 두려워도 기꺼이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 구경이가 이소라의 노래 중에서도 하필 <청혼>을 부르는 이유가 있을까. 가사가 더욱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 그게 재밌었다. “나는 당신을 믿을게요”라는 가사가 상황과 어우러지는 순간이.

- 구경이와 송이경 모두 가족을 잃은 비극을 가진 슬픈 여자들이고, 살아있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한 명은 의심하기를 다른 한 명은 남을 죽이기를 택한 셈이다. <구경이>를 쓰는 동안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작가들 자신에게는 어렴풋이나마 생겼나.

= 기획 의도에 썼던 말은 실제로 내 친구에게 들었던 꿈 이야기다. 큰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꿈에 신이 나와서 이 세상을 없애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왜 안 되는지 왜 살아야만 하는지 대답을 못 하고 있다가 꿈에서 깼다고 한다.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사는 동안 계속해야 하는 일 같다. 다만 구경이가 그랬던 것처럼 곁에 믿을만한 친구들이 있으면 그 과정이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는 것, 그렇게 대충이나마 계속 살게 되더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전부다.

- 앞으로 성초이의 정체성은 계속 유지될까.

A 일단 다음 작업을 또 둘이서 같이 하고 있다. <구경이>랑은 전혀 다른, ‘보편적인 대중 서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로맨스 장르다.

B 혹시나 말해두자면 게이 로맨스 아니고 이성애 로맨스다.

A (화들짝) 그랬나…? (웃음)

-혹시 <구경이> 시즌2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 지금의 팀 구성이 아니면 절대 또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드라마다. 이 좋은 배우들이 모두 스케줄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작가로서는 후회나 미련이 없을 만큼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주었고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그림이 아닐까 싶다.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성초이 작가들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자신들도 모르게 ‘시즌2에서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건 어떨까’ 습관적으로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있더라는 것. 혹여나 시즌2가 나온다면 시즌1의 서사를 잇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캐릭터들을 유지하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고 싶단다. 온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띤 송이경이 자문자답하듯 성초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이영애가 연기하는 케이, 김혜준이 연기하는 구경이 보고 싶다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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