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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법
정소연(SF 작가) 2021-12-30

JTBC에서 방영을 개시한 <설강화>라는 드라마가 있다. 1987년을 배경으로 남파 간첩과 여대생의 사랑을 다루었다고 한다. 방영 전부터 말이 많았다. 올해 초 유출된 초기 시나리오에 대학생인 여자주인공이 남파 간첩인 남자주인공을 운동권인 줄 알고 보호해준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JTBC를 비롯한 제작 관계자들은 시나리오의 일부가 왜곡되어 악소문을 탔을 뿐, 민주화 투쟁을 폄훼하거나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를 미화한 작품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방송이 시작되자, 주인공은 정말 운동권으로 오해받은 남파 간첩이었다. 이 간첩-운동권 설정은 민주화를 억압했던 독재자와 그를 추종하는 극우 세력의 주장이다.

실제로 독재시대의 많은 민주화 투사들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썼다. 독재정권은 시민 탄압에 북괴 간첩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씌웠다. 조금이라도 민주주의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목적의식 없이 평범하게 생활하다 무심코 독재자를 비난한 사람들도 모진 고초를 겪었다.

나는 독재 타도 유인물을 길에서 나눠주었다는 이유로 대학교 2학년 때 퇴학당한 의뢰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체포되자 여중생 동생은 등하교 때마다 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광화문 앞에서 30여m를 행진했다는 죄목으로 끌려가 구치소에 갇혔던 의뢰인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체포 당시 미성년자였다. 어부였던 국가보안법 피해자의 유가족도 있었다. 피해자는 배가 정박한 날, 항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통령을 욕했다가 간첩 혐의로 다음날 체포되고 그대로 구금되어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떴다.

일본에서는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의 대표적인 간첩 조작사건인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났었다. 일본 땅에서 자라다 조국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한국 대학으로 유학 왔다가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사람들이었다. 남산에 갇혀 몇달을 고문당하면서도 한국말도 잘 못하고 서울 지리도 모르니 자신에게 닥친 일이 대체 무슨 일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재일동포 유학생이던 남자 친구가 간첩 누명을 쓰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평범한 여대생에서 간첩을 숨겨준 공범이 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른 이도 있었다. 꿈 많던 20대에 한국에서 간첩으로 몰려 겪은 고초를 모여앉아 들려준 이들은, 이제 노인이었다.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을 후원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만났다. 오로지 연대의 의미로 조작 피해자들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접견하고 일본으로 귀국하던 중 불시에 조사를 받고, 수감자들의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이후 수십년 동안 한국에 입국하지 못한 일본인도 있었다. 가족에게 전달을 부탁받은 편지를 들고 있었을 뿐인 그는 그때도 지금도 한국어를 모른다.

바로 그 ‘설정’으로 독재정권이 조작사건을 만들었고, 수백명의 피해자가 있고, 그 피해자들의 싸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한, 간첩이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운동권으로 위장했다는 설정은 결코 소재가 될 수 없다. 그 피로 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과 폄훼일 뿐이다. 설사 창작의 자유가 이를 허용하더라도, 향유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비판하고 분노하고 거부할 일이다.